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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6-21 16:32
우루무치 기행문
 글쓴이 : 날범
조회 : 561  


오늘 경주고 동문 산행으로 남산을 찾았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찾은 통일전 감동으로 걸은 상쾌한 보행 중에도 걱정되는 마음도 생겼다. 친구는 불과 네명 , 전 동문을 다 세어봐도 37명 , 그 많던 동문은 다 어디 있나, 아픈가? 우울증인가?
걱정이 일었다. 산행 중 성규와 여행 얘기를 했다. 이제 먼 나라 여행을 할 수 있는 시간, 체력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이다. 이 코로나가 빨리 끝나면 먼 나라부터 다녀야겠다. 모두들 무슨 무슨 나라는 갔다고 하는데 무었을 봤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 지 모른겠다는 것이다.
읽을 거리가 없어 심심한 친구들 , 몇 번의 기행문을 올리고자 한다. 나에겐 보물 같은 추억을 공유할 수 있기를!



어떤 팔순 잔치

ㅡ우루무치 여행기 김 일호





2015년 7월12일 23시 41분 우루무치가 보인다. 하늘에서 첫 대면한 우루무치는 황색 할로겐 등을 켜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여기 오기까지 4시간 동안 나는 비행기 맨 뒤에 비어있는 세 좌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누웠다하며 승무원들의 움직임을 흥미롭게 지켜보느라 지루할 틈 없이 대륙을 건넜다.

입국수속을 마치고 나오니 01시다. 낯선 이국에서 맞은 김일이라는 조선족 가이드의 첫 인사는 중국과 대척관계에 있는 신강성의 소수민족 위구르족에 대한 경계가 삼엄해서 통행금지 전에 서둘러 호텔에 가야한다는 것이다. 일행은 마치 도망자의 모습으로 각자의 짐을 끌고 공항 변두리에 주차된 버스까지 뛰어가서 타고 호텔로 향했다. 이국에 대한 호기심 보다는 불안한 첫 밤이다.

우루무치에서 여행의 첫 밤을 보냈다. 이번 여행에 동행하신 분들은 일반 여행객들과는 다르다. 대개 학자이거나 예술인이다. 오늘부터 중국 서부 사막지대의 옛 실크로드를 따라가는 여행의 시작이다. 2층 버스에 오르자 가이드가 “여러분은 이제부터 단순함과, 지루함과의 씨름을 해야 합니다. 편하고 현란한 구경꺼리를 기대했다면 오늘 하루만 구경하고 공항으로 돌아가세요.” 여행안내자 답지 않게 잔뜩 겁을 주는 환영인사에 걱정하는 빛이 역력한 얼굴들이다. 이 곳은 봄과 가을이 없고 여름과 겨울만 있어 기온이 여름에는 45° 겨울에는 -40°까지 내려간다고 한다. 우르무치는 아름다운 목장이란 뜻으로 징기스칸이 명명했다지만 과연 그 아름다움은 기대할 수 있을 지 우려가 된다. 또 다른 아름다움이 있는지는 다시 한국으로 가기 위해 여기로 돌아올 때 답을 가지고 올 것이다.

첫 관광지는 천산천지로 북위 42도 해발 1800m 고지에 있는 호수다. 이를테면 백두산 천지와 같다. 다르다면 화산분화구가 아닌 분지에 천산의 만년설이 녹아 모인 호수인 점이다. 호수로 가는 길옆의 풍경이 광활하다. 낙타의 먹이라는 소소초 외에 다른 식물이라곤 거의 없는 황량한 사막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오늘부터 실크로드 서안에서 로마까지 87000km중 8분지 1정도를 7박8일 일정으로 다닐 예정이다.

그 동안 낯설었던 얼굴들을 익히는 자기소개가 있었다. 함께 하는 동행들이 다양하다. 문학인. 교수. 박물관학 공부하시는 분 등, 쉽지 않은 여행 코스인 실크 로드 여행을 대부분 특별한 기대와 각오로 왔는 것 같다. 자기소개 도중 이령 시인과 김 숙희씨가 시 낭송을 한다. 그 분위기에 잠긴 일행은 잠시 바깥 풍경에서 시상에 잠긴다. 여행의 목적은 새로운 풍경과 풍습이라고 하지만 함께하며 생길 새로운 인연도 기대한다. 이번 여행에서 어떤 만남이 있을까, 소개하는 모습에서 저 사람일까. 이 사람일까?

앞자리에 앉은 두 사람의 대화가 닮았다. 칠순도 넘었을 아버지와 서른이 조금 넘었을 둘은 부자간이란다. 나는 그 두분의 행로가 궁금해진다. 또 있다. 일행 중 가장 젊어 보이고 예쁘장하게 생긴 처녀가 엄마하고 여행에 동행하게 된 것이다. 부모님을 모시고 다니는 두 젊은이들이 기특하다.

고비사막 인근에도 황사를 막기 위해 나무를 심은 이후로 기후가 바뀌고 있는지 강수량이 늘어 시도 때도 없이 비가 오기도 한단다. 그렇지만 일 년에 10미리 내외 밖에 안 되는 여기가 황사의 진원지 고비사막이다. 고비란 두 산맥 사이 광활한 황무지를 이르는 말이란다. 그렇다면 고비사막은 여기뿐만 아니라 또 다른 협곡도 될 수가 있다는 말이다. 말이 사막이지 모래가 아니다. 바람에 넘실거리는 사구는 어디에도 없다. 어디를 봐도 시커먼 황무지에 소소초만 이를 악물고 자라고 있다. 멀리 풍력 발전기가 사막에 꽂아놓은 팔랑개비를 돌리며 도열하고 있다. 수만 개나 된다하니 그 발전량이 가늠이 안된다. 새벽에 공항을 빠져나와 호텔에 들렀으니 잠을 제대로 못 잤을 텐데도 모두들 창밖의 낯선 풍경에 열중이다. 내가 왔다는 걸 인증하려고 창밖에 연신 카메라를 들이대고 찰칵거린다.

보문호수만한 천지를 보려고 네 번이나 차를 바꿔 타고 왔다. 아직도 만년설이 녹지 않은 설산을 배경으로 유람선을 탄 여행객들이 추억의 현장을 담는다. 기대와 달리 천산 천지는 규모도 백두산 천지의 십 분지 일 정도란다. 가보진 안했지만 백두산 천지를 만난 감동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민족의 한이 서린 백두산천지는 그 너머 북한동포들의 눈물을 생각하고 있었을 테니까.

신강성은 위험지구라 어디를 가도 검색을 하고 총기를 가진 군인이 버스에 올라 검문을 한다. 범인 다루 듯 불친절한 공안들, 아직 중국은 자유로 가는 길이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열차를 타는 데도 짐 검사를 한다. 두 차례에 걸쳐 휴대품을 자탐 검색을 하고 몸 수색을 하는 통에 지고 있던 베낭을 잃어버렸다. 마침 과도한 짐은 갖고 온 노부인의 짐을 맡아 검색구에 넣고, 찾을 때 잊어버린 것이다. 다행히 가이드와 함께 찾아가니 보관되어 있어서 찾을 수 있었지만 만일 찾지 못했다면 모자, 우산, 부채, 등 자질구레한 소품이 없는 여행으로 고생이 될 뻔 했다.

유원까지 1실 4인용의 침대칸에서 10시간을 가야 한다. 좁은 칸에서 안 선생님 부자와 함께 하는 얘기가 재미있다. 재무부 출신 경제학자인 80세의 아버지와 44세의 인공지능 박사 아들의 대화가 끝이 없다. 인문학에서, 지리, 역사, 예술, 과학에 이르기까지 부자간의 대화가 마냥 부럽기만 하다. 대부분 부자간의 여행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그만큼 부자간의 대화는 더 어렵다는 것인데 덜커덩 덜커덩 꿈 속 같은 기차 바퀴 소리를 들으며 돈황으로 간다. 창밖 지평선까지 내려앉은 별들, 손에 잡힐 듯 창가에 매달려 있다. 잠시 정차를 한 어느 간이역에서 손교수는 내려 별들에게 인사를 하고 악수를 한 기분은 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날 야간열차는 동아시아의 조그만 반도에서 온 우리들을 광활한 대륙의 한 복판으로 데려다 주고 있었다. 열차에서 차려주는 아침 식사, 허술하지만 이 또한 별미다. 낯설다는 건 언제나 입맛 당긴다.

돈황의 입구인 유원에 내려 다시 버스에 갈아탄다. 죽을 고비란 말처럼 고비사막은 그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거무틱틱한 황무지에 삼 만개나 된다는 풍력발전기가 깃발처럼 꽂혀 있다. 4.5월이나 10.11월 우리나라에 황사를 보내는 바람이 여기선 전기를 만든다.

삭막한 사막을 4시간이나 지나서야 이번 여행의 주 목적지 돈황에 도착했다. 막고굴은 492개의 석굴을 사막에 구릉처럼 솟은 바위산에 판 것인데 그 중 관광 가능한 것은 6개 굴이다. 돈황시에서 동남쪽 20Km 거리에 있는 막고굴은 돈황을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한 핵심이다. AD 366년, 전진시대 사문 낙준이 명사산에서 금광(金光)을 보고 굴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현재의 막고굴의 시초이며, 역대 왕조를 거치면서 계속 만들어 졌고 대부분은 당대에 건설 되었다 한다. 당초 1,000여 석굴이 있었다고 추정되나 지금은 붕괴되거나 묻혀서 현재 발굴 된 것은 총 길이 1,800m에 492개의 석굴과 1,000 여점의 불상이 있고 키 30M의 대불상이 그 대표이다. 막고굴의 벽화나 조각상들은 불교 관련서적 뿐만이 아니라 인도의 힌두신들, 이 지역 역사 사실을 기록한 것도 있으며, 후대로 오면서는 완전한 중국식 불교 유산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막고굴은 1,300년간 도교 혹은 불교 승려들이 관리하고 있었으나 별로 알려지진 않았다. 그러다 1900년 이 굴을 관리하던 왕원록 도사가 16호 굴 안쪽 벽이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벽을 헐었고 또 다른 굴과 그 속에 많은 량의 서적을 발견 하면서 세상에 얼굴을 드러내었다. 글자를 몰랐던 왕도사는 정부에 17호 굴로 보고하였으나 청나라 말기 부패한 관리들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많은 고문서가 발견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맨 먼저 달려온 이는 러시아 탐험가 오브로체프가 싼값에 많은 서적을 얻어가고, 다음에 영국 지리학자 스타인이 1만권의 서적을 가져갔다. 1년 후에 중국어에 능통한 프랑스 동양학자 펠리오는 5천권의 알짜배기 서적을 얻어 가면서 막고굴이 세상에 알려지고, 그 중에 끼어 있던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도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막고굴은 진흙이 다져진 산 같은 구릉으로 굴속에 진흙으로 부처를 만들고 회를 입히고 채색을 한 것으로 이는 미켈란젤로도 사용한 프레스코 기법이라고 한다 장경동에서 거대한 불상이 발견되고 부터 수 천 년의 비밀이 밟혀진다.

어눌한 발음으로 해설하는 해설가를 따라 다니며 옛 위구르인이 이렇게 수많은 동굴을 파놓고 구복을 빌었던 장인이나 재력가들의 소원을 생각한다. 한 동굴에서 다빈치의 모나리자 미소 같은 보살상을 본다. 울듯 웃는 듯한 보살상에게 즐거운 윙크을 던진다. 일행은 우리나라 석굴암 부처가 크기로는 비교가 안될 만큼 적지만 세계에 최고임을 의심하지 않는다는 의견에 일치한다. 막고굴의 조각들은 진흙으로 만들었거나. 진흙으로 면을 고른 후에 회를 바르고 그림을 그렸지만 석굴암 부처는 화강암으로 피가 흐르는 듯한 부처를 만든 것이다.

돈황시 호텔에 짐을 풀었다. 하루 종일 관광으로 피곤할 만 했지만 그냥 잘 수는 없다. 이국의 밤풍경이 궁금한 우리는 돈황의 밤나들이를 한다. 돈황은 사막 한가운데 오아시스로 이루어진 도시다. 그런데 출렁이는 호수 위에 떠있는 듯한 누각들, 저 휘황찬란한 불빛들은 바람이 만들어낸 빛이 아닌가. ( 낮에 우리가 지나가며 보았던 풍력발전기에서 만들어진 전기) 누가 여기를 사막 한가운데라고 할 것인가. 신기루를 보듯 밤경치가 여행자의 피로를 잊게 한다. 호텔로 돌아와 문화재학과 박사 학위를 준비하고 있다는 정여사, 박세호 서예가와 로비에서 술을 하고 얘기를 나누었다.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리라. 젊은 서예가와 만학의 아름다운 여인과의 이야기로 돈황의 밤이 깊어간다.

여행 3일 차, 명사산으로 간다. 낮에 더워진 모래가 밤에 울며 마을로 돌아다닌다고 명사산이란다. 기차가 넘어진다는 바람에도 사막의 모래는 그 자태만 바꿀 뿐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곡선은 그 그림자와 함께 자연의 신비함으로 탄성을 지르게 한다. 이른 햇살에 드러난 사막의 맨살은 절묘한 명암으로 우리들은 벌써 먼 비단길을 떠나는 대상이 된다. 수백 마리의 낙타들이 사구가 만든 그늘에 엎드려 여행자를 가다리고 있다. 비탈진 사구을 오르며 우리는 그냥 야호하며 소리쳐 불렀다. 안 선생님의 아들이 뒷짐을 지고 아버지의 뒤를 따른다. 오늘 따라 더 행복해 보이고 젊어 보이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아들과 그 뒷모습을 보는 나는 또 누구를 생각하는가?

명사산에서 낙타를 타고 내려오면 사진작가들의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월아천이 있다. 월아천은 사막 한 가운데 수 천년 동안 마르거나 매몰되지 않은 신비의 샘으로 이름 그대로 초승달 모양의 작은 호수와 아름다운 도교 사원이다. 월아천, 누가 살았던 궁전일까? 세상에 어쩜 저렇게 아름다울까. 카메라가 바쁘다. 정원에 모신 관음보살이 너무 아름답다, 보살님이라기엔 너무 관능적이라 면구스럽다. 부처님 전에 삼배를 하고 평소에 하지 않던 불전을 낸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 낯선 사막에서 간절한 마음을 올린다.

하밀 호텔에서 바쁜 하루 일정을 돌아본다. 명사산에서 나를 태운 낙타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눈썹이 긴 낙타의 눈을 쳐다보며 그의 등을 빌린다는 것이 미안한 것은 가이드의 이야기 때문이다, 겁이 많아 앞에 가는 발자국을 보고서야 따라가는 낙타는 포유동물 중 유일하게 죽을 때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사막을 건너다 오아시스를 만나지 못하면 소소초를 먹으며 갈증을 참지만 소소초마저 마르면 그 가시가 혀를 찔러 흐른 피로 목을 축이며 사막을 건넌다고 한다. 이 피마져 다 흘리고 나면 죽는데 임무를 다하지 못하고 등에 태운 누란 공주까지 함께 죽는 것이 죄송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여행 도중 내내 그 생각은 흡족히 비가내리는 사막과 그 비를 맞으며 눈물 대신 빗물을 흘리며 히히힝 웃는 낙타를 생각했다. 돈황 거기도 비가 내리고 있는가!



누란의 눈물





돈황에 비가 내리고 있는가



하밀. 객사에 누워 빗소리 듣고 있는데

급하게 창 두드리는 소리

눈썹에 눈물 단 낙타 한마리

목이 말라요

공주님에게 물 좀 주세요

발꿉이 썩어 걸을 수가 없어요

거기 누구세요 비가 오고 있잖아요

비가 오는데 ... 거기 돈황인가요



사막은 언제 끝나는가. 해 지는 저 곳에 누란이 있는데

바람의 이불을 덮고 잠들면 공주는 누가 데려다 주나요

소소초가 말라가요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끈적한 액체

입안에 흥건한 이 피가 마르면 이 바다는 누가 건네주나요

여보세요

물 한방울만 주세요

누란까지만 살게 해 주세요



돈황. 거기엔 비가 오지 않나요

창밖엔 비가 오는데

내 꿈속엔 왜 이리 목이 마른가요





황사의 발원지 고비(우루무치)사막에도 식목사업이 눈에 띄었다. 나무 밑에는 급수 호수가 놓여져 천산산맥의 만년설이 녹은 물을 끌여다 일정한 수분을 공급하는 걸 볼 수 있다. 마귀성 가는 길가 농장에 대추가 나무마다 주렁주렁 가지가 휘어질 듯 열려 있다. 일 년에 10 미리도 오지 않는 사막에 저리 풍성한 대추와 포도를 열리게 한 것은 멀리 천산의 만년설과 그 녹은 물을 여기까지 끌어온 인간의 지혜와. 불가능을 모르는 집중과 반복의 역사라는 생각이 든다.

귀곡성, 앞뒤로 끝없는 지평선 그 광활한 사막에 바람이 진흙 덩어리를 깎아 만든 걸작품이 전시 중이다, 각가지 모양의 우상들, 거북 모습의 조각품을 쓰다듬으며 행운을 기대한다. 바람이 조각하면서 부는 휘파람소리가 귀신의 울음처럼 들린다는 사막 한가운데서 우리들은 바람의 열쇠에 모두 마음에 빗장을 열고 천진난만하다. 건륭황제가 찬탄해 마지않았다는 하밀과(메론) 한 입 가득한 일행들 모두 만족한 웃음이 귀곡성의 울음을 대신한다.. 귀곡성은 2시간 반의 지루한 여정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여행자



어떻게 모래로 귀신의 흉내를 낼 수 있겠어

사막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방황하는

바람이 서성이는 소리를 누가 들은 거야

밤새 잠 못 든 낙타가 환청으로 들은 것은 사구에

묻고 온 심장이 헐떡이는 소리로 들은 것이겠지

미처 사막을 건너지 못한 우상들이 모인 곳

그들이 바람이 불면 몸서리치며 옷깃을 붙잡는

소리가 이승을 떠나지 못한 상처들이 울고 있다고

생각하겠지



홀쭉한 가방을 지고 돌아가는 차에 오르는 당신

사막에 떨어진 또 다른 네가 멀어가는 눈동자를 따라가고

먼 훗날 또 다른 누가 이 곳을 지나다가 듣는 울음이

그 옛날 네가 흘려버린 상처라는 걸

어디 우리가 이곳이라고 눌러 앉을 세상이 있을까?

바람이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곳 , 여기 귀곡성에 있는 너나 나나





하밀을 떠나 트루판으로 간다, 455km를 4시간 반 동안 가는 동안 양 옆으로 펼쳐진 끝없는 사막, 길가에 사마귀처럼 꺼떡거리는 기계가 유전에서 기름을 퍼 올리는 중이란다. 땅 한 평에 1원이면 산다고 했던 사막에도 석유라는 자본의식이 들어오면서 중국과 우구르 자치족의 갈등이 심각한 수준이란다.

오아시스처럼 있는 휴게소에 내려 하밀과로 목을 축이고 다시 단순하고 지루한 풍경을 박세호 서예가가 벽화의 집중과 반복에 관한 강의로 버스는 이동용 교실로 긴장한다. 돈황 막고굴에 그려진 천정 벽화를 예를 들며 무슨 일이나 집중하고 반복하면 안 될 일이 없다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세계 두 번 째의 쿠무타크사막 그 동쪽 끝에서 지르는 환호성, 우리 모두는 모래가 구르는 찝차 위에서 아이가 된다. 놀이 공원에서 천룡열차도 무서워 못 탔던 내가 뒤집힐지도 모르는 사구를 오르내리는 찝차 위에서 환호성을 지른다. 정상에서 바라본 그 끝 모를 사막 앞에서는 누구나 철학자가 된다. 무한 광대한 사막의 사구에 앉으면 우주의 지구같이 외로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내가 날리는 한 줌의 모래가 서해를 건너 고향 지붕 위에 걸터앉아 서로 마주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없는 상상을 하며...

언제 우리가 사막을 지나왔나 싶게 여기는 해발 1800m, 제법 서늘하게 느껴지는 빠리쿤 초원지대로 올라간다. 이상한 것은 분명히 해발 1000m에서 1800m로 올라가는데 꼭 내려가는 환각을 느끼는 길이다. 제주도 오름길처럼. 길 가에 천산산맥 만년설이 녹아 만든 계곡에는 그 귀하디귀한 물이 소리를 내며 아래로 흐르는데... 자운영 풀이 무성한 초원에는 양떼와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우리는 방목된 양처럼 더위도 갈증도 잊어버리고 초원을 달리는 자연인, 목동이 되어 본다. 현지식으로 먹은 농가 식당의 텃밭이 낯설지 않다. 상치며, 풋고추, 열무 등 한국 우리 집에 있는 것과 똑같다. 어느새 입맛까지 익숙해져 모두들 맛있게 먹는다.

(마지막 날 우루무치 남산 목장에서 탔던 한혈마 승마체험을 여기 빠리칸 초원에 옮겨 놓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 같다)

아시아의 우물이라는 트루판 (땅이 갈아 앉은 곳)은 사해 다음으로 해발이 마이너스까지 내려가는 낮은 지형이다. 47도의 불가마 풍경 앞에서 우리는 현장법사가 넘어가던 날 손오공이 파초선으로 불을 껐다는 화염산에서 서유기를 떠올리며 그 촬영장에서 한 컷 주인공이 된다. 베제크리크천불동 그 묵언수도의 굴에서 만난 벽화. 70여개의 동굴은 독일인 스타인이 발견하여 세상에 알려졌지만 현재는 벽화가 뜯겨나간 현장만 남아 있다. 진흙 위에 그린 벽화를 어떻게 뜯어 갔는지 상상을 해본다. 물로 벽화를 축인 후 예리한 칼 같은 걸로 떠내어 말면 되었을 것 같은, 도굴의 현장을 만난다. 무지와 가난으로 지키지 못한 유산은 오늘날 그 가치를 측정할 수 없음을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는 것을 위구르인들은 알 것이다.

토담길 한 켠에서 기타 같은 민속 악기를 치는 노인에게 이령시인이 함께 춤추며 노래하고 스킨쉽을 한다. 함박 웃는 노인이 천진스럽다. 정말 여행의 참맛을 즐길 줄 아는 시인이다. 나도 함께 어울린다. 10위안으로는 너무나 귀한 추억이다.

실크로드의 척추, 천산사맥의 눈이 녹은 물이 트루판 포도농장의 젖줄이다. 고온 건조한 기후로 그 당도가 가히 비교할 과일이 없다 한다. 프랑스에서 현지 포도주 생산 공장을 시도 했지만 너무 당도가 높아 양질의 포도주를 만들 수 없어 철수했다고 한다. 아직 설익은 것 같은 청포도를 한입 물어 본다. 정말 달다.

고창고성 아스카나 고분군에서 미이라를 만났다. 부부 합장의 모습에서 누군가 이쪽이 남자라 한다. 수천 년이 지난 미이라에서 남녀를 구별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체격이 큰 쪽을 남자라 했는데 아니다 우리는 남녀의 구분법이 얼마나 단순한가, 남자의 성기로 찾아내는 그 단순함이 이승이나 저승이 합치한다. 누군가 종족본능이 세월을 넘는다고 한다. 습도가 거의 없는 이 땅에선 죽은 자는 거의 육포 상태까지 말라 그대로 미이라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에선 미이라가 흔한 풍경이란다.

고창고성과 교하 고성을 찾았다. 진흙 벽돌로 쌓은 집들과 지하에 땅굴을 파서 만든 주거지는 마치 거대한 다람쥐가 사는 집처럼 드나드는 출입구만 남았지만 그래도 목재를 사용한 주거지보다는 그 형태가 제대로 남아있는 것 같다. 교하고성은 두 하천이 서로 만난다는 뜻인데 사막에 웬 하천이냐는 물음에 또 하나의 불가사의가 있었다. 천산 산맥에서 눈 녹은 물을 화염산을 거쳐 고비 사막을 지나 투루판으로 끌어오는 일은 만리장성 쌓는 일보다 결코 쉽지 않다. 물이 증발하지 않도록 수로를 gps도 없던 시절에 정확하게 지하1.5m 깊이에 2천 여 갈래를 뚫어 수백km 까지 물을 옮겨 하천을 이루고 포도농장을 가꾼다는 것은 상상이 되지 않는다.

7박9일 여행 일정, 하루를 남기고 우리는 트루판에서의 저녁 만찬에 의미를 실었다. 팔순 생일기념으로 아드님과 함께 오신 두 분의 효성과 멋진 삶에 팔순 축하송으로 이번 여행의 대미를 장식한다, 평생을 재무 관료와 금융 통계로 살았다는 안 선생님이 “어쩌고 저쩌고”라는 간략한 건배사를 한다. 살면서 수많은 건배사를 했을 안 선생님의 건배사에 담긴 의미를 되새겨보며 그의 주문대로 “궁시렁궁시렁” 화답을 한다. 선생님도 수많은 여행을 해봤지만 이번 여행은 또 다른 의미 있는 여행이라며 만족해하신다. 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인 새로운 인연 , 깨우침, 훗날 나도 팔순 때 자식들과 후회 없는 삶을 축하받는 생일을 맞고 싶다

나는 이번 여행에서 앞의 두 분 부자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지식이 많은 것도 중요하지만 두 사람이 소통한다는 것, 지루한 사막 횡단 길에도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음악을 들려드리는 아들, 어느 듯 아버지의 보호자가 되어 아버지의 팔순을 의미있게 하는 아들을 보며, 이번 여행기의 제목을 “어떤 팔순 잔치”로 한다. 그 어떤 풍경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여행이라 하면 내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는 홀쭉한 배낭보다는 이 세상 잘 살았다는 흡족함으로 가득 채워진 저 분처럼 불룩한 배낭을 지고 돌아가고 싶다.

- 끝





- 애필로그



마지막 만찬을 마쳤지만 해는 아직 훤하다. 여기는 저녁 9시는 되어야 어두워진다. 우리 일행 몇은 몇 잔의 술을 더 시켜 마시고 밖으로 나간다. 사방이 포도밭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따로 갈 곳도 없지만 우리는 포도밭 한 귀퉁이에서 무대도 음악도 없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사진을 찍고 그렇게 추억의 포도밭 이야기를 만든다

. 다시 우루무치로 돌아가는 길 고속도로가에 염전이 보인다. 내륙 한가운데 바다같은 염전이라니 우리나라 한화그룹에서 소금을 채굴했으나 중국의 임금이 올라 철수했다고 한다. 정말 중국물가가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다 한다. 먼 산 천산에 하얀 만년설이 보인다. 년 중 반이 눈이 내린다는 그 눈이 녹은 물을 백여 키로까지 끌어다 키운, 끝없이 펼쳐지는 해바라기를 보며 지난 일주일 동안 펼쳐졌던 실크로드를 되새겨보는 상념에 잠긴다. 여행을 시작하며 가졌던 더위나 체력에 대한 걱정이 자신감과 의미있는 여행을 했다는 뿌듯함으로 충만해진다.

이번 여행에서 풍경과 함께 남는 인연들, 오래 내 기억의 창고에 저장되었으면 한다. 이번 여행을 주선해 주신 손진은 교수님. 그리고 기꺼이 저의 청에 동행해주시고, 일행을 무사히 이끌어 주신 박 순태 회장님. 총무로 수고하신 이령 시인. 늘 분위기를 밝게 해준 김 숙희 씨, 그리고 파트너였던 백은정씨 그 외 많은 분들이 생각난다. -끝

海印 20-06-21 17:07
답변  
긴 글 덕분에 잼있게 잘 읽었소이다.

좋은 여행 잘 다녀오셨습니다. 축하합니다.~~~ㅎ~~~

海印導師.  씀.
와이리 20-06-21 19:15
답변  
와이리가
1박2일 홍천, 가족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 오자마자
짐을 풀고서 처음 접한 글인데.......... 쉼없이 읽었다.
여행길을
기행문으로 詩로 표현해 주셔서 그 순간 그 감정을 같이 느끼는 듯하다.

쉽지 않은 먼 길을 잘 다녀 오셨네.....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리오~
ysha 20-07-14 10:40
답변 삭제  
멋진 곳 다녀 오셨네.
물 흐르듯 안내하는 길,
특히나 오래 전 부터 귀동냥으로 들은
고창고성, 현장법사와 고창왕의 인연이 재미있다는 고창고성
호탄, 지장보살의 땅이라고 하는 호탄.
치안문제만 없다면, 인도- 서북 인도-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지나 - 우즈벡  사마르칸트에서 동쪽으로 진군, 고창, 호탄 그리고 돈황 기타 등등을 나녀보고 싶다.

하여간 남은 이야기 주머니 다 풀어 놓아 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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