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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5-27 14:57
妖祥한 집터에 관한 回憶
 글쓴이 : 海印
조회 : 315  

이하 내용은 게시판이 썰~렁해서 올릴 뿐이지~~다른 목적은 없음을 밝힌다.

그러니까 지난 1967년 경이다. 나의 탄생지 경북 경주시 마동 987번지 소재의 과수원이 채권자의 손에 넘어가 버리자, 당장 이사할 곳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같은 동네의 6XX번지(대지 약 500평)의 집이 비어 있었다. 당 집은 같은 동네의 南虎龍 氏(6.25참전 상이용사) 소유의 집이었는데, 그 집에서 불이 자주 나는 등 흉한 일이 발생하자, 南 氏는 당 집을 비워두고 동네의 뒤 편 언덕에 새로 농가 집을 신축하여 이사한 후, 빈 집터였다.

당시 헐한 값에 그 집을 매수하여 海印 가족은 이사했다. 이사한 다음 해에 海印은 경주시 황오동 모처 횡단보도를 건너던 중, 교통사고를 당해서 千秋의 恨을 남겼다. 이하 설명하는 내용은 과학적인 근거는 없을지라도 거의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다.

즉, 그 집에서 육 년이 지난 시점에 海印은 고교를 졸업하고 장사를 하기 위해서 인근 도시 경주시 사정동으로 이사했다. 당시 자나 깨나 그 집에서 하루라도 빨리 떠나야 할 것 같은 正確하게 알 수 없는 某種의 强迫觀念에 시달렸다. 그래서 海印은 모친에게 거듭 말씀 드려서 마침내 허락을 얻었다.

사건의 발생은 그 시점부터 당 집에 세를 얻어서 이사를 한 가족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1973년부터 1978년까지 6년 동안에 일어난 사건을 말한다.

맨 첫 번째 이사를 들어 온 사람은 徐某 氏(作故)다. 그의 가족은 현재도 같은 마동 인근에서 구멍가게를 열고 있다. 徐 氏의 장남 서00이 같은 해 교통사고를 당해서 현장에서 즉사했다. 그래서 徐 氏 가족은 현재의 구멍가게 터로 이사를 가 버렸다.

두 번째 이사를 들어 온 사람은 裵某 氏(作故)다. 역시 공교롭게도 그의 아들 중 장남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현장에서 즉사했다. 사건 후, 전에 세 들었던 徐氏의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그의 가족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윗동네 탑마을로 이사를 가 버렸다.

세 번째로 집세 없이 이사를 들어 온 사람은 박수 무당이자 獨不將軍 崔某 氏였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그의 장남도 교통사고를 당해서 현장에서 즉사했다. 그러자 온 동네에 凶家라고 소문이 나고 이사를 들어오는 사람이 없어서 海印 가족이 경주에서 벌였던 중화요리 식당을 접고 다시 그 집으로 이사한 1978년도까지 약 이 년간 집이 비어 있었다.

불행은 그곳에서 그치지 않았다. 1978년도 코오롱 호텔에서 음악 관련 일을 하면서 아래채 방에서 월세를 살던 청년이 그곳에서 연탄가스에 질식사했다. 海印의 모친은 당 사건 때문에 경주경찰서로 여러 번 불려갔다.

불행한 사건은 그곳에서 끝나지 않았다. 먼저 기술한 南氏의 장남(남XX)이 역시 당시로 볼 때 최후에 교통사고로 현장에서 즉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 집으로 인한 가족의 불행을 피하고자 집을 신축하여 이사까지 감행했던 남씨 부부(作故)의 결행도 끝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海印은 연속된 凶한 사건을 직접 목격하면서 “참 이상하기도 하다. 내 후에 반드시 기록으로 남길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사실 海印도 장남(다만, 絶對的인 개념은 아니다)이다. 그 집에서 거주한 경험이 있던 가족의 장남 중에서 유일하게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은 衆生은 바로 海印뿐이었다.

그래서 그러한 믿을 수 없는 사건은 개인적으로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결혼하여 장남의 탄생 전에 그 집을 매매하기 위하여 맨 처음 그 집을 소개해 준 徐某 氏(철도청 근무 직원. 作故)를 찾아가서 그에게 “結者解之라~ 형님께서 이 문제를 풀어 줘야 할 것 같습니다. 가격에 상관없이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이 집을 팔아 주십시오”라고 그 간의 사정설명과 함께 간곡하게 부탁했다.

때마침 우연의 일치로, 근처에서 온천수가 나온다는 소문 때문에 그 영향으로 외지에서 투자하는 某氏에게 海印의 염원대로 장남의 탄생 전에 서둘러서 당 집을 매매할 수 있었다. 당시 위 徐某 氏가 전화로 적정가격에 계약하자는 소리를 하길래, 성동경찰서에 근무 중 특별휴가를 내고 당일 비행기를 타고 가서 매매 건을 성사시켰다. 그렇게 속이 후련할 수가 없었다.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그 때가 가장 속이 후련했다.

그 후 현재까지 딱 한 번 당 흉가를 근처에서 바라본 적은 있다. 왜냐하면, 비록 타인의 가족이었지만 당 집에 거주했던 사람들에게 발생한 연속적인 凶한 사건의 기억이 징그러웠기 때문이다. 당시도 그 집은 비어 있는 것 같이 보였다.

그래서 海印이 더욱 양택과 음택 풍수지리에 대해서 깊이 파고들었다. 이 세상일이란 어떤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발생한다는 인과관계의 등식이 성립한다. 설령 그럴지라도 불행한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는 연유는 반드시 면밀하게 살펴봐야 또 다른 불행한 사건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제언을 하면서 이만 글을 줄인다.

丙申年 癸巳月 己酉日 辛未時를 지나면서~~~

海印東洋哲學院에서 몇 字 記錄을 남기다.

海印導師. 合掌.


海印 16-05-27 15:03
답변  
위 사진은 까페에 올린 다른 사람이 카나다 여행시 찍은 사진을 가져와서 올렸다. 음울한 이야기를 몰아내고 붉은 꽃색깔과 같이 불운을 이겨내라는 의미다. ㅎㅎ
海印 16-05-28 15:29
답변  
또 한가지 재미있는 일은 집터가 센 그 집에 南虎龍씨가 살던 시절에 海印의 방에서 작고한 최모씨가 사법시험 공부를 해서 합격했다. 그는 1983년 중풍으로 작고한 검사장 출신의 최복구씨다. 그의 아들은 海印의 한해 후배였는데~~ 병인년에 음주 교통사고로 무고한 사람을 치고 나서~~ 자살인지 타살인지 몰라도~~죽고 말았다. 그집 며느리가 계사생인데 스타일도 쥑이고 얼굴도 미인형(몇년 전 결혼식장에서 봤는데 피부와 얼굴이 30대 같더라~~고노무 과부살만 없었더라면 ㅎㅎㅎ)인데 ㅋㅋ~~독실한 불교인이니까니~~~그만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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