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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1-09 12:13
三十六計 를 몇 마디 설파하다~~~ㅋ~~~
 글쓴이 : 海印
조회 : 363  
모두 잘 기억하다시피~~소싯절 학교다닐 시절에는 36계라고 말하면~~~

첫 35계는 다 빼먹고서리~~~그저 토기는 줄행랑이라고 알았다라고라~~~ㅋㅎㅎ~~~

그렇지만 오늘 36계의 정확한 역사에 대해서 몇마디 說破하려고 작정중이다.

당 <36계 병법서적>은 중일전쟁 중이던 1941년도에 발견되었고, 제 1판이 인쇄된 곳이 중공의 문화혁명이 한참이던 기미년(1979년)이었다.

기원전 6~7세기부터 이책이 편집되었다고 추론할진대, 약 1,500년전까지, 실로 1,000년이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이 생각하고 실제 생활과 전쟁 등을 겪으면서 지혜를 짜내서 만들어낸 당면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기술한 내용 습득은, 최선의 생존기술 습득방법의 선택이라고 말해도 모자람이 없다.

즉, 각종 생존과 <我와 非我의 鬪爭>현장인 생활속에서 지혜, 잠언, 교훈, 책략과 모사, 혹은 인간의 비정한 냉혹성, 잔인성, 비가치성 등 모든 생존의 모양새를 집대성하여 축적한 서적이라고 말해도 과히 모자라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生存하기 위한 각종기술의 凝縮과 集結板>이라 표현해도 모자람이 없는 책이다.

海印導師. 合掌.

海印 20-11-09 12:34
답변  
제 1계 : 하늘을 속이고 바다를 건너다.
제 2계 : 위나라를 둘러싸고 조나라를 구하다.
제 3계 : 타인의 칼을 빌려서 사람을 죽이다.
제 4계 : 적이 지칠때까지 편하게 기다린다.
제 5계 : 불난 틈을 타서 도적질한다.
제 6계 : 동쪽에서 고함을 치고 서쪽을 쳐서 취하라.
제 7계 : 없는 속에서 생이 있다.
제 8계 : 적 몰래 진창을 건너가다.
제 9계 : 강 건너 불은 구경만 하라.
제 10계 : 웃음 뒤에 칼을 숨기다.
제 11계 : 자두나무가 복숭아나무 대신 쓰러진다.
제 12계 : 손길에 순응하여 양을 끈다.
제 13계 : 풀밭은 쳐서 뱀을 놀라게 한다.
제 14계 : 시체를 빌려서 혼백을 돌려준다.
제 15계 : 호랑이를 꾀어내서 산을 떠나게 한다.
제 16계 : 사로잡고 싶으면 일단 놓아 줘라.
제 17계 : 돌을 미끼로 금옥을 끌어낸다.
제 18계 : 적을 이기려면 적왕을 사로 잡으라.
제 19계 : 솥 밑에서 장작을 꺼낸다.
제 20계 : 물을 휘저어 혼란한 틈에 물고기를 건진다.
제 21계 : 금매미가 허물 겁데기를 벗다.
제 22계 : 문을 걸어 잠그고 도적을 잡는다.
제 23계 : 먼 곳을 사귀고, 가까운 곳은 공격해서 취하라.
제 24계 : 길을 빌려서 괵나라를 치다.
제 25계 : 대들보를 훔쳐서 기둥으로 바꾼다.
제 26계 : 뽕나무 대신 회화나무를 욕한다.
제 27계 : 어리석은 체 하면서도 미치지는 않는다.
제 28계 : 지붕에 올려놓고 사다리를 치워버린다.
제 29계 : 나무 위에 꽃을 피운다.
제 30계 : 손님이 주인으로 바뀐다.
제 31계 : 미인계를 잘 이용하라.
제 32계 : 성을 비운 것 처럼 보이는 계략을 쓰라.
제 33계 : 각종 스파이를 장기적으로 최대한 이용하라.
제 34계 : 스파이에게 자상을 주어 진짜처럼 믿게하라.
제 35계 : 내부와 외부 이중 작전을 구사하라.
제 36계 : 최선을 다했음에도 적과의 전쟁 등에서 敗色이 짙으면 일단 살아 남기위해 도망이 최상책이다. 일단, 살아 남아야만, 복수와 재기의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海印導師.  合掌.
海印 20-11-09 12:48
답변  
현재 미쿡의 이민자 후손으로 조부와 애비 덕분에 실패없이 잘 자랐고, 잘 나갔던 잘난 도람뿌 兄兒는 제 36계책을~~~ 잘 못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ㅠㅠㅠ~~~

그러니까, 케네디 암살을 주도한 텍사스 군수공업 집단의 핵심 인종쓰레기 중 가장 나이가 적은 작자조차도 벌써 세월을 이길 수 없어서 거의 뒈지고 없실끼라~~~이 말인즉슨, 暗殺은 힘들 것이라고라~~~ㅋㅎㅎㅎ~~~

海印導師..  씀.
海印 20-11-09 12:57
답변  
<我와 非我의 鬪爭>이란 사용자로 가장 신빙성이 높은 신채호의 약력을 싣는다.

즉, 이름은 밝히지 않고 단지 ‘천희당’이라는 호와 ‘시화’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이 「천희당 시화」의 작자는 신채호(申采浩, 1880~1936)로 알려져 있다가, 한때 천희당이 윤상현의 호임이 밝혀지며 글쓴이가 누구인지 적잖은 혼선이 빚어지기도 한다.각주1) 그러나 문학관과 문체와 주변의 다른 글들을 두루 고려해볼 때, 「천희당 시화」는 신채호가 쓴 것이 틀림없다는 쪽으로 다시 가닥이 잡힌다.

충청도의 한 유생 집안에서 태어난 신채호는 자연스럽게 유교적 분위기 속에서 한학을 익히며 자란다. 이윽고 성균관에 들어간 그는 더욱 학문을 연마해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된다. 그러나 신채호는 우리 민족 고유의 정신 사상이 지닌 역량과 중요성을 깨닫고 과감하게 유교 사상을 떨쳐내고자 곧 성균관을 떠난다. 그는 『황성신문』의 논설 위원을 거쳐 1906년 『대한매일신보』 주필 자리에 앉게 되고, 1907년에는 신민회의 창립 회원으로 들어간다. 그 뒤 1910년대에는 신민회의 국외 독립 운동 기지 건설 계획과 관련해 중국 및 연해주 등지로 나가서 항일 독립 투쟁에 힘을 쏟는다. 이런 와중에도 신채호는 집필 활동을 중단하지 않고 문학가와 역사가로서 많은 업적을 남긴다.

그는 중국의 유교 사상 같은 모든 외래 사상을 물리쳐야 한다는 반외세론을 들고 나오는 한편, 예로부터 전해 오는 화랑도 정신인 ‘낭가(郎家) 사상’을 앞세워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세우려고 노력한다.


조선의 역사가 원래 낭가의 독립 사상과 유가의 사대주의로 분립하여 오더니, 돌연히 묘청이 불교도로서 낭가의 이상을 실현하려다가 그 거동이 너무 광망(狂妄)하여 패망하고, 드디어 사대주의파의 천하가 되어······ 그 뒤에 몽고의 난을 지나매 더욱 유가의 사대주의가 득세하게 되고, 이조는 창업이 곧 이 주의로 성취되매 낭가는 아주 멸망하여 버리었다. 정치가 이렇게 되매 종교나 학술이나 기타 모두가 사대주의의 노예가 되어······.

신채호, 「조선 역사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 『조선사 연구초』 ― 『신문화 100년』(신구문화사, 1980) 재인용

신채호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시종 일관하는 역사관으로 우리 민족과 다른 민족의 관계를 해석한다. 바탕에 흐르는 이런 사상은 그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준다.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으로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면 조선 민족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무엇을 ‘아’라 하며, 무엇을 ‘비아’라 하느뇨. 깊이 팔 것 없이 얕이 말하면,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선 자를 아라 하고 그 외에는 비아라 하나니, 이를테면 조선인은 조선인을 아라 하고 영(英) · 노(露) · 법(法) · 미(美) 등을 비아라 하지만, 영 · 미 · 법 · 노······ 등은 각기 제 나라를 아라 하고 조선을 비아라 하며 무산 계급은 무산 계급을 아라 하고 지주나 자본가······ 등을 비아라 하지만······ 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번극할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분투가 더욱 맹렬하여 인류 사회의 활동이 휴식될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전도가 완결될 날이 없나니,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니라.

신채호, 「조선 상고사」 제1편 총론 ― 『신문화 100년』(신구문화사, 1980) 재인용

조선을 아(我)로 생각하고 ‘밖’에서 들어온 유교를 비롯한 일체의 외세를 비아(非我)로 보는 반외세 사상을 꿋꿋하게 지키던 신채호는 「천희당 시화」에서 국력이 자꾸 약해지는 원인을 남의 나라 문자인 한문을 과신하고 우리의 문자를 천시하는 나쁜 습성 때문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우리의 문자를 새롭게 편성하고 다듬어 모든 국민이 읽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문으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7자 · 11자 일본 음절이나 중국 율체를 모방한 시는 국시가 될 수 없다는 논리를 펴면서, 그는 부녀자와 어린이 등 우리 나라 사람 모두가 부를 수 있는 민요인 「아리랑」 · 「파랑새」 · 「영변가」 등에 신사상을 담아 개작한다.

그는 시조에서도 한시투가 아닌 애국 또는 상무(尙武) 정신을 담고 있는 김종서의 「삭풍가(朔風歌)」와 남이 장군의 「장검곡(長儉曲)」 같은 것을 국시 개혁의 본보기로 추천한다. 그러나 신채호는 국시 개혁의 가장 중요한 목적을 「천희당 시화」에서 “시가(詩歌)는 인(人)의 감정을 도모함으로 목적하나니”라고 하거나, 시는 “국민 지식 보급에 효력이 내유(乃有)”해야 한다고 해서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고 지식을 전달하는 데 둔다. 이런 계몽적 시론과 아울러 그는 국시 개혁을 이끄는 시인은 여느 사람이 아니라 “대시인이 즉 대영웅이며, 대시인이 즉 대한이며, 대시인이 즉 역사상의 일거물(一巨物)”이라고 하면서 영웅적 시인론을 펼친다.

신채호의 시론이 투영된 작품은 「천희당 시화」를 연재한 1909년부터 이듬해까지 『대한매일신보』의 고정란인 ‘사회등’에 꽤 발표된 것으로 추측되나 확실하게 그의 이름으로 남아 있지는 않다. 그의 시는 국한문 혼용체로 난해하게 표현된 「철추가(鐵椎歌)」말고는 1910년 한일합병 뒤 국외로 망명해 쓴 작품이 대부분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채호는 「소설가의 추세(趨勢)」에서 소설을 “국민의 나침반”이라고 일컬어 시뿐 아니라 소설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곧 민족의 현실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국권 회복의 길을 제시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소설의 맡은 바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차 소설도 회음(誨淫) 소설이요, 피 소설도 회음 소설이라. 미인의 야유 용태를 묘출(描出)하며 남자의 화류 신분을 사래하여 일독하매 음심이 맹(萌)하며, 재독하매 음심이 탕케 하니”라고 말해 중국 것을 모방한 고대 소설과 가정 소설, 정치 소설을 빙자한 ‘회음 소설’과 풍속을 해치는 ‘연애 소설’은 국민 문학에서 배격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역시 소설의 교훈적 · 계몽적 기능을 중요시한다. 그는 이와 같은 소설 이론의 실천 행동으로 1916년 「꿈하늘」과 1928년 「용과 용의 대격전」을 발표한다. 두 작품 모두 환상적이고 우화적인 수법으로 씌어진 것이지만, 두 작품 사이의 12년에 이르는 간극에서 신채호의 민족주의적 영웅주의 사관이 점차 투쟁적 민중 이념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신채호는 중국 베이징을 주요 무대로 급진적 민족주의자로서 무장 투쟁 노선을 걷다가, 1920년 뒤로는 무정부주의연맹에 들어가서 활동한다. 1928년 그는 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공작을 벌이던 중 일제의 헌병대에 체포된다.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감옥에서 갇혀 지내던 단재 신채호는 1936년 3월 25일에 뇌일혈로 숨진다.

언제 꺼져버릴지 모를 만큼 쇠잔한 국권, 그 흔들리는 국권을 끊임없이 넘보던 일본 제국주의와 맞선 상태에서 우리 민족에게 요구된 것은 무력 투쟁만이 아니었다. 국민 대중의 힘을 모아내는 애국 계몽 운동이나 문화 투쟁 또한 시대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그 일환인 ‘동국 시계 혁명’은 1909년 항일 민족 언론 기관인 『대한매일신보』에 연재된 「천희당 시화」가 불을 당기고, 그 ‘정신’은 점차 애국 계몽 단체에서 펴낸 학회지나 잡지를 통해 뻗어나간다.

그러나 우리 문학사에서 한 전환점이 될 뻔한 신 · 구 문학의 교체 혁명론은 문학이 나라의 흥망 성쇠를 좌우한다는 지나치게 비약된 문학 지상주의와 영웅주의 사관에 빠져 구체적인 방법론을 내놓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한다. 그나마 내놓은 방법도 사대주의 극복을 비롯한 반외세론 정도에 머문다. 이런 혁명을 이끈 신채호 역시 유교적 잔재에서 벗어나려는 욕구는 강하였으나, 작품 속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한시투가 보여주듯이 문학 이론과 실천 행위인 시작(詩作) 사이에 적지 않은 거리를 드러내고 만다. 반외세 성향과 유교적 잔재의 틈바구니에서 불거진 갈등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으며, 따라서 애국적 항일 투쟁 의식을 담은 그의 사상 소설 또한 도식화한 계몽 의식을 드러내는 데 그치게 된다.

신채호가 펼친 애국 계몽 문학론은 1920년대에 이르러 진정한 민중 사회를 건설하려면 폭력 투쟁으로 특권 지배 계급을 타도해야 한다는 폭력적 민중 혁명론이 나오는 발판이 되기도 한다. 민중 중심 사관에 바탕을 둔 그의 문학관은 한국 문학사에서 카프 계통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융성하게 만드는 씨앗 구실을 하며, 뒷날 진보 성향의 민족 문학론자들이 이어받아 발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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