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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2-09 11:25
퇴임
 글쓴이 : 김영재
조회 : 786  

친구들에게
모처럼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제 자주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아쉬웠던 나날들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교사 김영재

人死留命 虎死留皮, 노병은 사라질 뿐이다. 흔적을 남기자 마라.
퇴임을 앞두고 이런저런 생각이 난다. 그냥 조용히 물러가지. 뭐 떠들썩하게 야단스럽게 할 필요가 있나. 그래도 40년을 지켜온 한 직장인데 아무리 세월이 변했다해도 그냥 떠나기는 좀 그렇지 않나 등 설왕설래 말이 많기도 하다.
별 할말은 없지만(?) 조금이라도 후배들에게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과 내 자신을 되돌아 보고 정리해 본다는 의미로 몇 자 적어 본다.
교사로서 39년 6개월을 별탈없이 지금까지 올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저를 아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특히나 뭐 하나 내세울 것도 없는 나를 믿고 지금까지 뒷바라지를 해온 집사람과 저 세상에 계신 부모님, 딸 셋과 사위들에게도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부산교대를 ‘74년 2월에 졸업을 하고(교대 12회) 발령이 나지 않아 일 년간 농사를 짓던 일, 농사일도 별로 체질에 맞지 않아 어머니가 어렵게 마련한 학비로 동아대학 국어국문과에 편입해 신나게 대학을 다닌 일. 드디어 1975년 9월 1일자 문현동 소재 성동국민학교에 발령이 나 3학년 수업을 시작한 시절. 그러면서도 수업이 마치자마자 야간대학에 가 나머지 학기를 채우던 시절. 그런 일들이 밑천이 되어 지금처럼 중등학교 국어 교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24살의 나이로 성동국민학교에 발령을 받은 지 어언 40년 세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속에서 별로 지루하지 않게 지내올 수 있었던 것은 국민학교 5.5년, 중학교 3.5년, 고등학교 31년 근무로 변화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자랑이랄 것은 아니지만 그동안 특별한 사정으로 3년만 빼고는 담임을 했다는 것이나 전근간 학교마다 교사 축구 동아리를 만들어 함께 뛰고 즐겼다는 것이 제일 기억이 남는다.

성동국민학교시절 - 햇병아리 교사로 아이들과 함께 딩굴고 달리고 하며 지난 시간들, 가을 운동회 때면 6학년을 상대로 한 덤블링 연습과 릴레이를 하면 한껏 실력을 뽐내던 시절이 그립다. 토요일 오후가 되면 학생들과 함께 육상지도를 한다고 구슬같은 땀을 흘리던 일. 첫 월금 오 만을 받아 집에 가니 어머니가 한숨을 푹 쉬던 일. 25세의 나이로 ‘76년에 결혼을 하니 동료 선생님들에게 놀림(?)을 당한 일. 오르간을 못 쳐 공병우 타자기로 손가락 연습을 해도 안 되어 결국은 순위 고사를 쳐서 중학교에 올라와 근무하게 된 일 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간다. 성동조기회에서 한 선배가 ’자는 빼라, 너무 어리다.‘라는 소리를 들으며 시작한 조기 축구 덕으로 교직원 축구대회며 육상대회에 출전하여 입상하여 즐기던 일. 멋 모르게 열심히 신나게 보냈던 것 같다. 지금도 그때 졸업생들을 만나 옛날의 추억을 더듬어 보며 그 당시를 회고해 보곤 한다.

청동국민학교 시절 – 첫 전근간 학교가 영도에 있는 청동국민학교였다. 문현동에서 차를 2번 갈아타고 가야할 통근길이 꿈만 같았다. 새벽같이 집을 나서 학교 근처 정류장에 도착하여 깔딱고개 같은 등굣길을 허우적허우적 걸어야 겨우 교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苦盡甘來라, 6학년 담임을 맡아 참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출퇴근이 걱정되긴 했지만…. 그 덕분으로 고모님도 만나고 가족끼리 쌓인 갈등도 풀 수가 있었다. 발령 2 주만에 순위고사가 있어 중학교로 올라오긴 했지만.

동평여중 시절 – 멋 모르고 신나게 보냈던 시절 같다. 살기가 어렵고 해서 특히나 여학생이라 퇴학을 하는 학생도 많았다. 가정방문이 의무적으로 할 때라 가 보면 이런 곳도 있구나 할 정도로 가난했었다. 물론 지금은 상전벽해가 되었지만. 그래도 그 끈끈한 정만은 지금보다 나았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그 당시 맘에 맞는 선생님들과 33년 차 모임을 지속하고 있다. 또 쉰이 다된 제자들과의 모임도 가끔이어지고 있다.
당감동 산비탈의 신설학교. 폭우에 무너지고도 한 연후에 지어진 아담한 학교. 손바닥만한 운동장이었지만 축구하기에는 정말 좋았다. 이 학교 저 학교로 옮겨 다니며 축구 시합을 하고 부전시장 지하상가에서 돼지수육으로 뒤풀이 하던 시절. 이제는 아련한 추억의 뒤안길이다. 이젠 다 변해서 흔적도 없지만. 집이 17번 종점(감천)이고, 학교가 시발점이라 한 잔하고 시내버스를 타고 다닐 땐 에피소드도 참 많았지.

부산진고 시절 – 중 3학년 담임을 맡아 치열한 입시 경쟁을 위한 학업에 열을 올리던 4월 말, 부산진고에 자리가 있으니 갈 생각이 있느냐하는 제의가 들어왔다. 3힉년 반학생들에게는 미안한 맘이었으나 절체절명의 찬스였다. 꼭 가 보고 싶었다. 어렵게 교장 선생님의 허락을 받아 진고에 중간 발령이 났다(5월 12일자).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남자들만 득실되는 것 같고 엄격한 생활과 짜여진 틀에 의해 일과가 돌아가고 있었다. 정규 수업도 만만찮은데 보충 수업이랑 야자랑 시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게 하루가 갔다. 특히나 고전문법을 하느라 생 고생을 했다. 차차 인문계 생활에 젖어드니 재미도 있었다. 틈틈이 축구도 할 수 있었고 어렵긴 하지만 선배, 동료들과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다.
입시가 치열한 시기라 원서 쓸 때 담임들의 입김이 강했다. 3학년 담임을 하면서 출신 대학에 대한 열등의식이 생겼다. 주위의 권유도 있고 해서 동아대학원 국어국문과에 입학을 했다. 5학기의 공부를 끝내고 졸업을 하니 마음이 놓였다. 여러 가지로 열심히 노력했던 시절이었다.

개금고 시절 – 인문고에 제법 틀이 잡혔고 자신감도 생겨 하는 일들이 재미있었다. 5년 근무 중 3년을 3학년 담임을 했다. 신설 학교라 학교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고 학생들도 잘 따랐다. 근무도 열심히 했지만 선생님들과 자주 어울리는 기회가 많았다. 어쩜 고등학교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산상고 시절 – 축구가 하고 싶어 동래고로 희망을 했으나 부산상고로 발령이 났다. 실업고가 파장인 때라 썩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있으랴. 불만을 가진 체 학교에 가 보니 대단했다. 3만평의 부지(보통은 학교는 5천평 남짓)에 큰 건물이 2동과 기타 부속 건물이며 진입로며 교문과 정식 축구구장과 야구장 테니스장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었다. 전통이 있는 부자 학교는 다르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봄이 되면 학교 울타리를 뒤덮은 붉은 줄장미며 학교 정원의 벚나무 군락, 곳곳에 쑥 캐러 들어 온 아주머니들의 모습이며 학교 울타리에 생긴 개구멍이 27개(?)라 든가…
그와 대조적으로 학생들의 성적은 참담하다못해 말하기조차 부끄럽기만 했다. 동창회에서도 자구책을 마련해 100여년 지켜오던 남고와 상고을 없애고 인문계 남녀공학으로 개명하기에 이르러 교명도 ‘개성고등학교’로 바꾸었다. 참 세상이 많이 변했음을 알 수 있었다.
상고가 취업이 안 되니 모두들 대학 진학을 위한 변화가 일어났다. 실업계선생님들의 전과가 시작되고, 인문과목 선생님들이 주요 보직을 차지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주판이 자취를 감추고, 컴퓨터가 부상하고… 나도 3학년 부장을 맡아 2달간 입시를 위한 합숙을 하였다. 시즌이 끝나 텅 빈 축구부의 합숙소를 빌려 50명을 모아 스파르타식으로 훈련하였다. 학생들도 좋아라 하고 학부모님의 호응도 좋았다. 참 보람있는 나날이었다. 결과(입시성적)도 좋았고 기억에 오래오래 남을 시간들이었다.
그 당시 같이 전근 온 국어과 4분 선생님의 성이 모두 김 씨라 4우회라는 모임도 만들어 얼마간 지속되었다. 4년의 세월이 물같이 흘렀다. 전근올 때는 불평이 많았는데 두고두고 그리워지는 학교다. 그 당시 근무한 선생님들과 ‘春日會’라는 모임을 만들어 지금도 만나고 있다.

부산남일고 시절 – 잘 나가는 남일고, 가고픈 학교. 소위 A급 학교, 거기다가 선배정으로 왔으니, 담임은 자동(지금과 달리 담임을 서로 하고자 했음). 학생들도 다들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고 학구열에 불타고 있었다. 특히나 남고라 더 신이 더 났다. 나이도 지긋하고(?) 경륜도 쌓았다. 가르치는 일도, 행정업무도 자신이 있었고 재미도 났다. 학교에서 광안리 바다를 바라보면 그 풍경이 참 다채로왔다. 아침이며 동해의 해돋이를 마음껏 감상할 수 있었고, 저녁 야자 감독이면 휘황찬란한 광안대교의 불빛에 흠뻑 취했다(지금은 아파트 때문에 거의 볼 수가 없다). 황혼녘이면 황령산으로 해가 서서히 질 때 산 그림자가 길게 망미동과 광안리를 덮을 때의 신비함을 무엇으로 표현해야 할지. 학교가 높아 등굣길에 땀께나 흘리지만 3년을 지나 보면 다리에 알이 통통히 가진다는 농담이 농담만은 아니 것 같았다.
10월 8일(?) 개교기념식을 서둘러 마치고 급히 차에 올라 설악산 단체 등산을 떠난 것도 새롭게 기억된다. 공룡능선의 오르막 내리막. 이제는 언제 다시 가볼꼬?. 동래고와의 정기 축구 시합과 뒤풀이의 왁자지껄한 모습이 새삼 그리워진다.

중앙고 시절 – 남일고와 같은 남자 인문계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생각나는 건 학교 주변의 숲이 참 아름다웠다. 공원같은 학교 정원에서 떨어지는 단풍을 바라보는 재미도 솔솔했다. 수능고사 치루기 전 11월 초순에 단풍제가 있어 고사도 지내고 달빛과 단풍이 어울어진 숲에서 돼지고기에 소주 한잔도 낭만이었다. 금정산 고단봉 금샘에서 수능 대박 기원제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사정상 성동조기회를 그만 두고 베트민턴을 시작한 것도 이 학교에서 이다. 지금까지 아침마다 베트민턴을 학교 학교에 등교한다.

만덕고 시절 – 수영에서 학교까지 승용차로도 1시간, 지하철과 마을버스를 환승해도 1시간이 더 걸린다. 물론 차기 밀릴 땐 다르고. 나는 주로 지하철을 이용했다. 출근할 때 지하철과 환승하는 마을버스. 참 재미있었다(?). 등교시간이라 여간 복잡한 게 아니다. 버스 입구에만 학생들이 모여 있다. 통발에 장어 모여들 듯. 뒷 사람은 아랑곳 않는다. 물론 뒤에 탈 학생들도 별로 관심이 없다. 지각을 하든말든. 서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참 안타깝다.
이 때 내가 옛날 실력(중 1,2학년 때 경주에서 내남 용장까지 8km 통학한 경험)을 발휘하여 버스 차장 노력을 톡톡히 했다. “오라이-”, “ 야, 좀 같이 가자.” 등등으로 학생들을 독려한다. 별효과는 없지만 그래도 한두명이라도 같이 갈 수 있으니 다행이었다.
만덕고는 백양산 기슭에 위치함으로 공기가 맑고 등산로가 멋지다. 또한 등굣길 옹벽에 붙어 있는 도자벽돌도 명물이다. 만덕동 일대가 가을이면 노오란 은행 단풍으로 뒤덮는다. 참 장관이다. 3년 동안 같은 담임을 한 학생이 6명이다. 그 학생들 입장에서 보면 참 불행이라 여길 것이다. 묘한 인연이었다. 다들 잘 지내고 있는지. 그립다. 불평불만으로 갔던 학교가 떠날 때는 자꾸만 뒤돌아 보였다.

현재 (부산남일고 시절) - 9년만에 다시 남일고로 돌아왔다. 집도 가깝고 교직생활 마지막을 내가 원하는 학교에서 보내고 싶어…. 별로 변한 것은 없었지만. 운동장에 인조 잔디가 깔렸고 교실은 나무, 복도 는 대리석으로 단장을 했다. 복도 창문이 모두 교실 내부가 보이도록 투명 유리로 되어 있었다. 광안리 바다가 쪽으로 아파트가 들어서 전망이 전과 같지 않았다.

이 학교에서 정년을 학고 싶었지만 여러 사정상 1년여를 앞두고 명예퇴직을 하게 되었다. 시원섭섭한 맘을 금할 수 없다. 會者定離요 去者必反이라지만 떠난다는 소리가 그리 기분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열심히 한다고 해 왔지만 아쉬움도 참 많다. 약 40년의 세월이 꿈 속같이 그렇게 흘러간 것 같다. 만나고 떠나간 많은 사람들, 그들 모두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이렇게나마 교직 생활을 여한 없이 보내게 된 것이 다 그분들 덕이라 여겨진다. 마지막이 된 남일고. 함께 근무한 여러 선생님들과 학생들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 모두 다 건강하고 항상 행운이 함께하기를 빌면서…

2015년 1월 남일고에서.

海印 15-02-09 11:48
답변 삭제  
김영재 선생님 오랜 직업생활에 참으로 수고가 많았소이다.

역시 국어선생님답게 주옥같은 글로써 자신의 학교일생을 써 내렸다. 잘 읽었다. 순간순간이 역사이고 흔적이다. 자서전같은 글로 느껴진다.

이제 또 시작이다. 그러니까 귀천세하지 않는 순간까지 어차피 인생은 치열하게 살아야만 한다. 과거는 소용없다. 오로지 현실만 존재할 뿐이다. 우주가 항존할때까지는 말이다.

지금은 국내여행이나 해외여행을 다녀 오든가 이니면 일단 좀 쉬고 또 은퇴자의 길로 열심히 가기를 바란다.

海印.
와이리 15-02-09 13:50
답변  
그간 수고하셨나이다.
늙은(?)선생님한테서  배운다고 그 학생들도 욕봤다.  ㅎ
조금만 더 다니면 정년퇴임을 할 수 있는데 왜 명예퇴직을 택했을꼬...

會者定離 去者必返~
소암 15-02-09 20:40
답변  
친구 퇴직을 축하합니다.
지난 세월이 주~욱 흘러가고,
추억은 남고,,,
선생님들 좋은건 제자들도 남고...
멋진 한바탕 인생이다.
이제 슬슬 남은 즐거움을 찾기만 하면 되네.

와일아 反이나 返이나 같이도 쓰인다.
     
와이리 15-02-09 20:54
답변  
같이 쓸 수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와이리는 처음 보는 것 같아서..
최초에 이 용어를 쓴 사람이 어떻게 썼는지에 따라 다르니까...
국어쌤이 썼으니 맞을 수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물건의 반품이나 반환 등 되돌려 주는 것이나 되돌아 오는 것은 返,
반대 등 거스르거나 뒤집는 것의 의미로는 反을 쓰는데....
海印 15-02-09 21:29
답변  
와선생 레이다에 걸렸구나 ㅎㅎ

나는 소암이 때문에 눈치를 챘다.

국어샘이라고 척척박사는 아니고 실수 오타도 있을 수 있다. 기냥 봐주라. ㅋㅋ

오늘도 공치지 않았으니 이제 자야할 시간이다. 잘 자거라.

海印.
     
와이리 15-02-09 22:38
답변  
꼬집거나 봐주거나 그런 게 아니고.....
이참에 재미있는 한자를 찾아서  공부를 해 봤더니.... 재미있네~

又(또 우)는 오른손을 둥글게 말아 쥐고 있어  손등만 보이는 모습

反(되돌릴 반)은 주먹(又)을 열었다(厂)는 것으로 손바닥이 보인다는..
      *  厂은  '네모(口)처럼  막힌 것'을  열었다는...
    그래서 손등(又)과 손바닥(反)은 정반대를 의미...안과 밖, 겉과 속..

返(돌이킬 반)은  '돌이켜(反) 가는(走) 행동'을 나타낸다
      * 辵(辶 갈 착) = 走(달릴 주) = 사람의 다리.... 즉, 걷다, 달리다.
영남이 15-02-10 10:33
답변 삭제  
요즘 공무원연금 개혁한다니까
교육공무원들이 명퇴 신청이 넘쳐 남다더니...
울 김 쌤도 그래서 1년 일찌기???
海印 15-02-10 11:17
답변 삭제  
명퇴는 개인적인 사주팔자를 보고 실행하면 가장 이익이 된다.

즉, 2017년 대선때까지 표를 의식한다면, 새눌당에서 함부로 공무원 연금개혁에 큰칼을 못댄다. 이리저리 핑계대면서 대선때까지 질질 끌고 나가라고 전번 연금개혁 우짜고저짜고 할 때, 海印이 미리 갈켜 줬단 말이다. ㅎㅎㅎ

생각해봐라! 뒈질라고 쥐새끼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라고 하겠는가 말이다. 물론 쥐약을 먹든거 빼갈을 강제로 처먹이든가 히로뽕을 처 먹이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

海印.
영하 15-02-11 11:48
답변 삭제  
수고하셨습니다.
  한번 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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