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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드립니다
■ 시인의 말
어둠 위에 어둠이 겹칠 때에야 희미하게 들어나는 너를 볼 수 있었다.
또 빛이 어둠을 앗아가자 너는 조금씩 사라졌다.
너는 언제나 물속의 그림자처럼 야위었다.
애써 안으려 하면 돌아섰고 맨 얼굴은 보여주지 않았다.
그렇게 너는 내 곁에서 떠나지도 다가오지도 않았다.
내가 껴안은 것은 너의 그림자
어스름을 만지던 손으로 촛불을 켜다가 데인 가슴이었다.
- 2015년 10월, 김일호
■ 출판사 서평
김일호의 시는 사유의 양식으로만 보면 전형적인 서정시다. 그의 시는 자아와 세계의 거리가 없는 동일화를 본질로 구축되어 있다. 그의 시에서 자아와 세계가 교감할 뿐 아니라 사물은 사물끼리 서로 교감한다. 자아와 세계는 객관화되지 않고 서로 연대되어 있다. 그러나 김일호의 서정시는 동일성의 아집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의 시는 근본적으로 이 세계를 안이하거나 무비판적인 낙관과 화해로 보고 그것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자아와 세계가 대립하고 갈등하는 현실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서정의 영역을 확대해 나가는 시편들을 생산하고 있다. 그의 시는 서정시의 친숙한 문법을 끌어들이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방법적 탐구와 치열한 자의식으로 시인의 상상력을 긴장시키면서 서정시의 질적 깊이를 갱신하고 있다. 그것은 언어의 형식의 새로움과 함께 현실 재현의 문제를 아울러 담음으로써 서정의 현실적 가능성까지 타진하고 있는 것이다.
김일호의 시는 꼼꼼한 형상화 능력과 함께 밤하늘의 별이 우리의 길을 밝혀주는 지도가 되는 시대에 산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를 역설했던 루카치 이래의 리얼리즘의 정신을 밑바탕에 든든히 깔고 있다는 점에서 서정의 현실적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는 지점에 놓인다.
- 손진은(시인, 경주대 교수)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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