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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10-25 19:55
꿈 속의 넋 - 이옥봉
 글쓴이 : 沼岩
조회 : 433  




自述[夢魂-꿈 속의 넋] 李玉峯, 숙원 이씨


近來安否問如何오(근래안부문여하오) 근래 안부는 어떠하신지요?

月到紗窓妾恨多라(월도사창첩한다라) 달빛어린 창가에서 이 몸의 한은 깊어만 갑니다.

若使夢魂行有跡이면(약사몽혼행유적이면) 만약 꿈길에도 오간 흔적이 있다면

門前石路半成沙라(문전석로반성사라) 문 앞의 돌길은 절반은 모래가 되었을 거예요.



첫 행은 오지 않는 임에 대한 그리움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그 그리움은 이내 원망으로 바뀐다. 애초 동전의 양면처럼 그리움의 반대편엔 원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을. 오지 않을, 아니 올 가망이 전혀 없기에 그 원망은 점점 깊어진다. 잠 못 이뤄 몸을 뒤척인다는 표현은 얼마나 간결한가. 그 속에는 작중 화자가 하고 싶은 모든 말이 압축돼 있다. 여기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만약 꿈속에 내 영혼이 자취를 남긴다면, 문 앞의 돌길이 반쯤은 모래가 됐을 겁니다.”에 이르면 그 절망의 긴 터널 속에서 지르는 외마디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그 영혼이 돌길을 모래로 만들 정도로 배회했겠는가. 돌길이 모래로 변했다는 이 기막힌 표현은 절망의 세월 속에 지르는 외마디 비명이다.



조선의 시인 이옥봉...사랑에 꺾인 애달픈 시심


조선 인조 때의 일이다.

승지 조희일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 원로대신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조원을 아느냐”는 물음에 조희일이 부친이라 대답하니, 원로대신은 서가에서 <이옥봉 시집>이라 쓰인 책 한 권을 꺼내보였다. 조희일은 깜짝 놀랐다. 이옥봉은 아버지 조원의 소실로 생사를 모른 지 40여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옥봉의 시집이 어떻게 해서 머나먼 명나라 땅에 있게 되었는지 조희일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원로대신이 들려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40년 전쯤 중국 동해안에 괴이한 주검이 떠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너무나 흉측한 몰골이라 아무도 건지려 하지 않아 파도에 밀려 이 포구 저 포구로 떠돈다는 것이었다. 사람을 시켜 건져보니 온몸을 종이로 수백 겹 감고 노끈으로 묶은 여자 시체였다. 노끈을 풀고 겹겹이 두른 종이를 벗겨 냈더니 바깥쪽 종이는 백지였으나 안쪽의 종이에는 빽빽이 시가 적혀 있고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 씌어 있었다. 읽어본즉 하나같이 빼어난 작품들이라 자신이 거둬 책을 만들었다고 했다.


온몸을 시로 감고 죽은 여인 이옥봉. 이옥봉은 조선 명종 때 충청도에서 왕족의 후예 이봉지의 서녀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시문에 뛰어난 재주를 보인 옥봉은 신분의 굴레로 첩살이밖에 못함을 알게 되자 결혼에 대한 꿈을 버리고 서울로 갔다. 옥봉은 장안의 내로라하는 명사들과 어울리며 단종 복위운동에 뛰어들었고, 곧 시귀나 짓는 선비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옥봉은 조원이란 선비를 사랑하여 첩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첩살이가 싫어 결혼을 거부했던 그였지만 사랑 앞에서는 약해진 모양이다. 한데, 조원은 옥봉을 받아들이는 대신 앞으로는 절대 시를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라 했다. 여염의 여인이 시를 짓는 건 지아비의 얼굴을 깎아내리는 일이 라면서. 옥봉은 맹세했다. 자신의 시는 외로움과 허망함의 발로였으니 지 아비를 얻으면 시를 쓰지 않아도 좋으리라고.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조원 집안의 산지기 아내가 찾아와 하소연했다. 남편이 소도둑 누명을 쓰고 잡혀갔으니 조원과 친분이 두터운 파주목사에게 손을 좀 써달라 했다. 사정을 들어본즉 아전들의 토색질이 분명했다. 옥봉은 파주목사에게 시 한 수를 써보냈고, 산지기는 무사히 풀려났다. 그러나 이 일로 옥봉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조원이 “약속을 지 키지 않는 여자와는 살 수 없다”며 내친 것이다.


뚝섬 근처에 방 한 칸을 얻어 지내며 옥봉은 조원의 마음을 돌려보려 애썼으나 허사였다. 조원과의 약속을 지키느라 10년 가까이 시혼을 억눌러오다가 산지기를 위해 한 수 지어준 일로 쫓겨나다니. 옥봉으로서는 야속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으리라. 옥봉은 애통한 마음을 담아 시를 읊고 또 읊었다. 더이상 참을 까닭도 없었으니까.



평생 이별의 한이 병이 되어(平生離恨成身病)

술로도 못 고치고 약으로도 다스리지 못하네(酒不能療藥不治)

이불 속 눈물이야 얼음장 밑을 흐르는 물과 같아(衾裏泣如氷下水)

밤낮을 흘러도 그 뉘가 알아주나(日夜長流人不知)



조원을 단념한 옥봉은 평소 가보고 싶었던 중국으로 가 마음껏 시심을 펴보려 했나 보다. 그리고 자신의 시로 몸을 감고 낯선 바다에 뛰어들었나 보다. 여성을 가정 내 존재로 규정하고 그 틀을 벗어나는 여성은 천시하거나 사회적 보호 밖에 두었던 조선시대의 여성관에 죽음으로 항의한 셈이다. 사랑을 위해 시를 포기했지만 자신의 삶은 결국 시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침묵으로 웅변하면서.


(옛날 같이 마라톤하던 포항 어느 선생님의 블로그에서 가져왔다.)

와이리 16-10-25 20:04
답변  
하고 싶은 게 있을 때에
하지말라고 하지말라고 아무리 말려도
틈만 보이면 언제나 
그 틈속에서 살며시 고개를 쳐들어 내미는 것을.........

아픔이 詩가 되고  사랑이 詩가 되는 것.......
윤능모1 16-10-25 21:35
답변 삭제  
소암선생 !
멋진시를 사연을 역어가 뒷글로 풀이 해주
오랫만에 잘 살펴 보았다
한마디로 멋지다 !
팔만법보의 금언성구도 내가 알아 새겨야한다
어느 빤때기에 이리 말할꼬 !

근데 뚜데니는 글씨는 와이리 쪼맨하노 !
가원 16-10-26 09:29
답변 삭제  
엮시 감정이 풍부한 암선생!
좋은 시 감사합니다.
은강 16-10-26 20:06
답변  
만약 꿈길에도 오간적있다면^
문앞의돌길은 절반은 모래라~!~

"좋은싯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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