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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11-30 08:04
참고 삼아 읽어 보시라꼬~~~ㅋ
 글쓴이 : 海印
조회 : 1,799  
   https://www.facebook.com/unha.hwang?fref=pb&hc_location=friends_tab&pn… [82]
황운하 교수부장의 글이다. 그와 안 지는 약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 하도 항명 사건 등으로 똑똑한 위인이 버벅거리길래~~~~명리학문적인 조언을 하겠다고 접근했었다.~~~세월 참 빠르게 느껴진다~~~ㅎ

즉, <나는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가>

황운하(경찰대학 교수부장)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라는 명언을 남긴 사람은 19세기 독일의 법학자였던 루돌프 폰 예링이다. 그의 법학 강의는 명강의로 알려져 강의 때마다 수백명이 몰려들었고, 수강생이었던 러시아 황태자는 예링을 “인류에게 법학의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에 비유하기도 했다고 한다.

예링이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서 4년 남짓 교수를 지내다가 1872년 독일 괴팅겐 대학으로 옮기기 전에 법률가협회 초청으로 강연을 했는데, 그 원고를 정리해 출간한 책이 바로 유명한 ‘권리를 위한 투쟁’이다.

예링에게 법의 생명은 투쟁이다. 법의 목적은 평화이지만 그 평화를 얻는 수단은 투쟁이라고 말한다. 투쟁하는 가운데 스스로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투쟁은 불법에 대한 저항을 의미하고, 권리를 지키는 것은 모욕당한 인격을 되찾는 일이며, 공동체 전체의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라고 한다.

자신의 권리가 불법적으로 침해당하고 있는데도 권리 위에 잠잘 경우, 자신의 권리만 침해 당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상황에 처한 이웃의 권리까지 침해당하는 것이므로 권리 침해에 저항하는 일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일 뿐 아니라, 이웃과 공동체에 대한 의무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예링의 권리투쟁은 숭고한 공동체적 사명이 된다. 자신의 권리가 무시당하고 짓밟힌 경우에도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스스로를 벌레로 취급하는 자는 그가 짓밟힌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불평할 수 없다”는 칸트의 말로 개탄한다.

정의의 여신이 한 손에는 권리를 재는 저울을, 다른 한 손에는 권리를 관철시키는 검을 들고 있는 까닭은 저울이 없는 검은 폭력에 지나지 않으며, 반대로 검이 없는 저울은 무기력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예링은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권리침해와 불법에 대해 각성하고 저항하라고 촉구하고 있는 듯 하다. 자신의 침해당한 권리에 대한 투쟁은 인간 존엄성이라는 가치에 대한 주장이자 자기 보전의 정신적 의무이고, 모독당한 권리의 주체자로서 마땅히 분노해야 하며 비겁과 태만에서 벗어나 용기와 결단으로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저항하라고 말하고 있다.

20세기 일본의 가장 뛰어난 정치학자인 마루야마 마사오는 예링의 명제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를 통해 헌법의 가치인 주권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설명하기도 했다. “국민은 주권자가 되었다. 그러나 주권자라는 사실에 안주해 그 권리의 행사를 게을리 하면 어느 날 아침 깨어나 보니 이미 주권자가 아니게 되는 그런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자유도 마찬가지다. 마루야마는 말한다. “자유를 축복하는 것은 쉽다. 거기에 비해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자유를 시민이 매일매일 행사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민주주의는 자유의 실천, 주권의 실천을 통해서만 비로소 살아 있는 것이 된다.

민주주의 제도 자체만으로 민주주의적 삶이 온전히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자유와 주권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도 끊임없는 ‘민주주의 실천’을 통해서 비로소 민주주의일 수 있다.

예링이 법의 목적이라고 말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투쟁이 있어 왔다. 지금 누리고 있는 평화가 있다면 역시 부단한 투쟁의 산물일 따름이다. 그러기에 그 부단한 노력에 동참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무이자 축복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침해당한 권리의 주체가 나라면, 과연 나는 그 어떤 희생도 불사한 채 용감한 소수자가 걸었던 순교자와 같은 길을 걸을 수 있을까?

깨어있는 시민의식과 권리를 위한 투쟁 없이 민주주의가 진전되기는 어렵다.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앙시앵 레짐을 붕괴시킨 힘은 계몽주의로 무장한 시민정신이었다. 그 계몽정신에 대해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는 “계몽은 미성숙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간결하게 정의했다.

최순실 사태가 벌여 놓은 현실은 참담하다.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국정시스템에 참여하는 엘리트들은 왜 경보를 울리지 않았을까?

비정상의 정상화라는 국정 모토하에서 오히려 너무나도 비정상인 일들이 횡행하는데도 권력에 기대어 단물을 빨아먹느라 눈멀고 귀막고 있었던 것인가?

미몽에 빠져 각성하지도 분노하지도 투쟁하지도 못한 집단들과 후진적인 국가시스템에 광장의 깨어있는 시민들은 분노하고 있다.

예링은 자신의 강연문을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빌려온 문장으로 맺었다. “지혜의 마지막 결론은 다음과 같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쟁취하는 자만이 향유한다.” 싸우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누릴 수 없다.

황운하 경찰대학 교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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