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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5-20 09:16
[記事] 혜경궁 홍씨와 노론은 왜 사도세자를 등졌나
 글쓴이 : 와이리
조회 : 391  

재미있게 읽어 본 인터넷 중앙일보 기사가 있어서 퍼왔다.

요즘 항간에 떠도는
'혜경궁 김씨 @08__hkkim' 트윗 계정의 주인공과 관련해서
혜경궁 홍씨 시절의 당파.계파 싸움에 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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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와 노론은 왜 사도세자를 등졌나]
유성운 입력 2018.05.20. 01:00 수정 2018.05.20. 08:01 댓글 171개


사도세자는 음력 5월말인 무더운 여름날 뒤주 속에 갇혀 8일 동안 울부짖다가 사망했습니다. 워낙 엽기적이고 비극적인 사건이다 보니 많은 연구자의 호기심을 자극했는데 이중 특히 관심을 모았던 것은 사도세자 처가의 역할입니다.
장인 홍봉한은 당시 정국을 주도한 노론의 리더였는데 왜 이를 막지 못했냐는 의문에서 시작됐습니다. 심지어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은 오히려 반(反)사도세자 세력에 가담했고 나중엔 정조의 대리청정까지 막았는데 결국 집안의 당파적 이해 때문에 세자를 희생시킨 것이 아니냐는 논의까지 발전했습니다.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도 혐의에 올랐습니다. 그녀가 쓴 『한중록(閑中錄)』은 사도세자의 미치광이 증세를 상세하게 기록하면서 영조의 ‘결단’이 불가피했다는 식으로 정리했기 때문입니다.
혜경궁과 그의 집안은 왜 사위인 사도세자를 등지게 된 것일까요.

- 사위가 죽자 더 번성한 처가
혜경궁 홍씨는 1735년 홍봉한의 차녀로 태어나 1815년 81세로 생을 마쳤습니다. 아들인 정조보다 무려 15년을 더 살았던 셈입니다. 장수했지만 삶은 결코 평탄치 않았습니다.
27세가 되던 해 왕을 이을 줄 알았던 남편이 시아버지의 손에 의해 죽더니, 그 후 아들은 얼굴도 못 본 시아주버니 효장세자(태어난지 2년 만에 사망한 사도세자의 형)의 아들로 입적돼 ‘대비(大妃)’의 자리에도 오를 수 없는 신세가 됐습니다.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올랐는데도 혜경궁이라는 신분으로 머무르게 된 이유입니다.

대비가 아니면 왕실에서의 위상은 물론 영향력에도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정조가 죽은 뒤 10살 어린 시어머니(영조의 두 번째 부인 정순왕후)의 친정인 경주김씨 세력에 의해 홍씨 집안이 도륙될 때는 가슴을 쥐어 뜯으며 바라봐야 하기도 했습니다.
풍산홍씨 집안은 어땠을까요. 이들은 노론에 속했지만 혜경궁 홍씨가 입궐하기 전까진 그다지 주목받는 집안은 아니었습니다. 선조의 부마인 홍주원의 후손인 홍봉한은 딸인 혜경궁이 세자빈으로 간택된 후에야 비로소 과거(문과)에 급제했으니까요. 하지만 딸 덕분에 팔자가 180도 바뀝니다. 각종 요직을 거치다 영의정까지 오르며 노론의 핵심 인물로 거듭나게 됩니다.

흥미로운 건 사위인 사도세자가 죽으며 이들 집안이 오히려 더 번창한다는 사실입니다.
홍봉한은 좌의정과 영의정을, 홍봉한의 동생 홍인한은 호조참판, 도승지, 이조판서, 우의정을 지내며 승승장구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홍봉한의 맏아들인 홍낙인은 승지-이조참판-대사헌-도승지, 둘째 아들 홍낙신과 홍낙임은 승지, 홍봉한의 사촌인 홍송한은 공조판서-형조판서, 조카인 홍낙성은 형조판서-이조판서, 조카 홍낙명은 이조참의-대사간-대사헌을 지냈습니다.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한 집안이 주요 관직을 독점하는 현상이 벌어진 셈입니다. 그만큼 사도세자 사후 영조가 이들 집안에 의존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이런 정황 때문인지 학계 일각에선 혜경궁 홍씨 집안이 사도세자 보호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노론의 주요 가문인 여흥 민씨ㆍ경주 김씨 등과 긴밀히 혼인 관계를 맺어와 당파 입장에서 자유롭기 어려웠다고 보고 있습니다.


- 노론은 왜 세자를 싫어했을까?
사실 사도세자는 노론 입장에서 이상적 후계자의 조건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전에도 소개했지만(‘영조의 의리, 정조의 의리, 그리고 박근혜의 의리’) 노론은 영조를 왕으로 추대하기 위해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다. 경종이 왕이었을 때 연잉군(영조)을 차기 계승자인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고 대리청정도 맡기라고 요청했다가 당시 여당인 소론의 공격을 받고 주요 지도부가 처형되기도 했습니다.
사도세자는 자신들이 추대한 왕의 친아들이었고, 처가 또한 노론 집안이니 금상첨화였습니다. 사도세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세자를 칭찬하고 기대하는 노론 측 인사들의 발언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 양측이 반목하게 된 것은 영조 25년의 대리청정부터입니다.
연유가 있습니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영조 25년은 이른바 ‘토역 정국(討逆政局)’이라고 불리던 시기였습니다.
영조는 노론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을 반대했던 소론도 온건파 일부를 등용하는 탕평책을 썼습니다. 이에 노론 측은 시간이 갈수록 경종을 지지했던 '역적(소론)'을 토벌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도세자가 정치 전면에 나선 건 바로 이런 분위기가 고조되던 시기였습니다. 학계 일각에선 영조가 골치 아픈 문제를 피하려고 세자에게 떠넘겼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혈기왕성한 사도세자는 노론 측이 내민 ‘복수혈전’ 요구를 일축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소론의 몇몇 인사들과 가깝게 지내 노론을 격분하게 만듭니다.
특히 지난 번 소개한 ‘나주 벽서사건’(‘영조도 당했다. 조선도 '드루킹' 있었다’) 처리에서도 소론 측 인사들에 대한 처벌을 최대한 온건하게 이끌어 노론과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됐습니다.


- 당파 싸움보다 더 무서운 계파 갈등
하지만 최근의 연구 경향은 사도세자의 죽음엔 노론-소론의 갈등보다는 노론 내 계파 갈등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봅니다.
사실 영조 시대에 정계에서 거의 축출된 소론은 노론의 위협 대상도, 경쟁 상대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권력을 독점한 노론 내 분열과 갈등이 훨씬 심각했습니다.
당시 노론은 세자의 장인인 홍봉한을 따르는 부홍파(扶洪派)와 홍봉한을 공격하는 김구주 중심의 공홍파(攻洪派)로 나뉘어 서로를 견제했습니다. 권력을 독점한 부홍파와 이를 약화시키려던 공홍파의 갈등은 결국 사도세자의 비극으로 이어졌다는 추론입니다.
아무래도 세자가 폐위되면 홍봉한을 정점으로 공홍파가 몰락할테고, 공백지가 된 권력을 접수하겠다는 것이 공홍파의 계산이었죠. (위에서 서술했듯이 그 계산은 틀어졌고 이들은 사도세자가 죽은 뒤에도 북당(北堂)과 남당(南堂)으로 재편되어 서로를 공격했습니다.)

이런 시각엔 사도세자의 죽음에 직접적인 계기가 된 ‘나경언 고변사건’이 큰 영향을 줬습니다.
나경언이라는 인물이 형조에 사도세자의 각종 악행을 과장해 고발한 사건입니다. 영조는 이를 듣고 격분하여 “이젠 (세자에게) 남은 희망이 없다”면서 개탄했고, 보름 후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했습니다.
그런데 세자의 비행을 고발한다는 것은 속된 말로 아무리 간(肝)이 부어도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당시부터 배후가 있을 것이라는 의혹이 적지 않았는데 훗날 실제로 공홍파 인사들이 사주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처럼 조선시대 당파엔 입장이 다른 계파가 존재했고 이런 계파간의 대립이 당파간의 대립보다 치열했습니다. 이때 뿐이 아닙니다.
정조 때도 노론은 벽파와 시파가 대립하다가 순조 시대 때는 번갈아가며 숙청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야당인 소론도 준론과 완론이 반목했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지지만 최초의 질문으로 돌아가볼까요.
부홍파의 리더이자 노론의 실력자인 홍봉한과 그의 집안은 왜 사도세자의 최후에 침묵했을까요.
사실 홍봉한은 "전하(영조)께서 평소에 너무 엄격하기 때문에 동궁(사도세자)이 늘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제대로 말씀드리지 못한다"고 말하는 등 한때는 사도세자를 보호하기 위해 나름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한중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히기 몇 달 전 큰 '사고'를 쳤습니다. 아버지 몰래 평양에 다녀왔는데 넉 달 후 이를 알게 된 영조는 노발대발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사도세자가 평양에 간 이유가 쿠데타 준비 때문이라고도 주장합니다.)

사도세자는 이때 혜경궁 홍씨에게 “아마도 무사치 못할 듯하니… 나는 폐하고 세손(정조)은 효장세자의 양자를 삼으면 어찌할까 본고”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효장세자는 태어난 지 2돌만에 죽은 사도세자의 형입니다.

이 발언은 이미 당시 분위기가 사도세자가 무사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흘러갔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이무렵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가 세자 처소에 와서 얼마간 머물면서 모자 간의 애틋한 정을 나누었다는 『한중록』의 기록도 이런 추정을 가능케 합니다.
1762년(영조 38년) 5월 15일 발표된 영조의 ‘폐세자반교문’은 총 2건인데, 이중 한 건은 구성이 흥미롭습니다. 바로 영빈이씨의 발언을 통해 사도세자는 각종 비행과 문제점을 조목조목 밝힙니다. 이 사건이 정치적 사전 조율을 거쳐 진행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혜경궁 홍씨의 집안은 이미 영조의 마음이 떠난 사위(사도세자)보다는 외손자(정조)를 보호해 가문의 위상을 지키는 '플랜 B'로 방향을 설정했던 것 같습니다.
세자가 사망하고 3개월 남짓 지난 8월 26일 사도세자의 장인이었던 홍봉한의 상소문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성상의 이번의 거조(사도세자의 처분)는 진실로 부득이한 것이었고 그날의 교시(敎示)도 역시 부득이한 것이었습니다…애통해 하는 마음은 애통해 하는 것이고, 의리는 의리이니 사사로운 애통으로 인하여 공적인 의리를 가릴 수는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영조실록』 38년 8월 26일)

그런 점에서 혜경궁 홍씨가『한중록』에서 사도세자의 비극적 최후가 그의 '광기(狂氣)' 때문이라고 강조한 것도 이해가 됩니다.
사도세자가 죽은 뒤 시중엔 '죄인지자 불가승통(罪人之子 不可承統·죄인의 아들은 왕위 계승이 불가하다)'는 말이 떠돌았습니다. 사도세자의 아들 세손을 겨냥한 정치적 마타도어였습니다.
하지만 사도세자가 그저 '미치광이'라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국법상 죄인의 아들은 왕이 될 수 없지만 미치광이의 아들은 제약이 없습니다.


- 이재명을 공격하는 친문 지지자
얼마 전 한 일간지 1면에 '혜경궁 김씨는 누구입니까'라는 광고가 실리며 큰 화제가 됐습니다. '혜경궁 김씨'는 트위터를 통해 지난 대선 전후 문재인 대통령을 비난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이 광고의 발주자가 친문 지지자 일부가 중심이 된 커뮤니티로 드러나면서 정치권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이미 광고 전부터 이들은 '혜경궁 김씨'라는 아이디의 주인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경기지사 후보의 부인이라고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고, 경선 후엔 "이재명 후보를 찍느니 자유한국당 남경필 후보를 찍겠다"는 집회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친문 일부가 이재명을 극렬하게 싫어한다는 건 알았지만 신문 광고로까지 저격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비록 ‘혜경궁 김씨’라는 존재가 불씨가 됐지만 양측의 갈등은 연원이 깊습니다.
친문 측에선 이 후보가 2007년 대선 경선 당시 정동영 후보 측에서 일했던 전력부터 마땅찮게 여겼습니다. 지난 대선 경선에서 문재인 후보에 대해 가장 강력하게 의혹을 제기했던 것에도 앙금이 남아있습니다.

정치권 일각에선 친문 특유의 '순혈주의'가 작용하고 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차기 대선 유력군에 속하지만 친노-친문의 ‘피’가 흐르지 않는 이 후보에게 힘을 실어주는 걸 꺼린다는 것입니다.
사도세자의 비극에서 보여지 듯 가장 치열한 싸움은 권력을 독점한 당파 내부에서 벌어지는 경쟁과 갈등인 듯 합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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