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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11-01 11:46
금강산은 북한에만 있다.............?
 글쓴이 : 와이리
조회 : 412  

금강산...
가고 싶어도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금강산이라고.......? 아니다.

설악의 끝이요,
금강산 1만2천봉이 시작되는 제1봉이 바로 신선봉(1204m)이란다.
그 신선봉이 울산바위 바로 뒷쪽에 보이는 악산(惡山)의 봉우리다.
금강산 구경을 가고 싶은 사람은 신선봉으로 올라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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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 울산바위 전설]

산신령이 금강산을 만들고 있을 때였다.
『어떻게 하면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을 만들까」하고 며칠간 궁리하던 신령은 묘안을 하나 얻었다. 1만2천 개의 봉우리를 각각 그 형체가 다르게 조각하면 훌륭한 모습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금강산에는 그만큼의 바위가 없었다.

그래서 신령은 전국 각지 산에다 큰 바위는 모조리 보내도록 엄명을 내렸다.
큰 바위들은 모두 금강산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
이때 경상도 울산 땅 큰 바위도 누구에게 뒤질세라 행장을 차려 금강산 여정에 올랐다.
원래 덩치가 크고 미련한 이 바위는 걸음이 빠르지 못해 진종일 올라왔으나 어둠이 내릴 무렵 지금의 설악산에 당도했다.
날은 저물고 다리도 아프고 몸도 피곤해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았다.
『에라 이왕 늦은 김에 이곳에서 하룻밤 쉬고 가자.』
하룻밤을 편히 쉬고 다음날 아침 금강산으로 떠나려고 막 한 발자국을 내디디려는데 금강산 신령이 보낸 파발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어젯밤 자정으로 금강산은 이미 1만2천봉을 다 채웠으니 오지 말라는 분부요.』
바위는 기가 막혔다. 어찌나 분하고 섭섭했던지 그만 엉엉 울고 말았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자니 길도 아득할 뿐 아니라 체면도 말이 아닐 것 같았다.
한참 넋을 잃고 우는 바위의 모습을 지켜보던 금강산 사자는 몹시 딱했던지 바위 등을 어루만지며 위로했다.

『이 설악산이 금강산만은 못하나 울산 땅보다야 나을 것이니 여기서 머무는 것이 어떠하겠소.』
이 말을 들은 바위는 그냥 그 자리에 머물러 있기로 작정했다.
이 바위가 「울산바위」라 불리우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울산에서 왔으니 그렇게 부르자는 설악산의 공론에 따른 것이며, 바위 밑에 지금도 맑게 흐르는 물은 그때 바위가 흘린 눈물 탓이라고 한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몇 천 년이 지나 배불숭유 정책을 쓰던 조선시대였다.
울산바위 얘기를 들은 울산 원님은 은근히 배가 아팠다.
울산바위를 뺏긴 것도 억울한데 설악산이 금강산 다음으로 아름답다니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며칠 간 끙끙거리던 원님은 어느 날 묘책을 떠올렸다.
설악산 신흥사를 찾아가 스님들을 골탕먹이자는 계획이었다.
유생들이 득세하던 그 당시 스님 몇 명 골리기는 어렵지 않았다.

어느 날 해가 으스름할 무렵 신흥사 뜰에 교자 한 채가 놓였다.
『여봐라, 울산고을 원님의 행차시다. 주지 계시느냐?』
포졸이 거드름을 피우며 주지 스님을 불러댔다.
신흥사 주지는 때아닌 손님에 놀라 방으로 맞아들였으나 원님은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불호령을 내렸다.
『이 방자한 녀석들아, 너의 설악산에 우리 고을 바위가 서 있음에도 모른 체하기냐?』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스님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원님의 다음 말은 더욱 뜻밖이었다.
『금년부터 바위세를 바치도록 해라. 만일 세를 내지 않을 경우 너의 절은 폐찰을 면치 못할 것이니라.』
엄청난 액수의 요구였으나 신흥사는 울며 겨자먹는 격으로 매년 꼬박꼬박 바위세를 원님에게 바쳤다.
절의 살림은 점차 어려워졌다. 새로 부임한 주지는 이 부당한 관례를 깨기 위해 노심초사했으나 묘안이 떠오르질 않았다. 주지 스님은 식음을 전폐하고 궁리에 몰두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동자승이 스님의 안색을 걱정하며 물어왔다.
『스님, 요즘 무슨 걱정이 있으신지요?』
『너는 상관할 일이 아니다.』
『소승에게서 혹시 좋은 방안이 나올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동자승이 캐묻자 주지 스님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동자승은 그런 일쯤 가지고 무슨 고민을 하시느냐며 바위세를 받으러 오거든 자기에게 보내달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드디어 원님행차가 당도했다.

주지 스님은 동자승의 말이 하도 당돌했던지라 슬며시 동자승을 불렀다.
『우리 절에선 울산바위가 아무 쓸모가 없소. 그 바위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 자리에 곡식을 심어 수확을 올릴 텐데 매년 손해가 큽니다. 그러니 세를 받기로 한다면 오히려 우리지 당신네가 아닙니다. 금년부터 세를 못 내겠거든 바위를 당장이라도 파 가시오.』
동자승의 말이 한 치 빈틈없이 조리에 맞자 기세가 당당하던 원님도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그냥 지고 말 수는 없는 터였다.
『그러면 네 말대로 바위를 파 갈 터이니 내가 시키는 대로 만들어 놓아라.』
『원하는 대로 해 줄 터이니 꼭 가져가기나 하시오.』
『좋다. 새끼를 태운 재로 바위를 묶어 놓아라. 한달 후에 와서 끌어 갈 것이니라.』
주지 스님은 아무리 생각해도 새끼를 태운 재로 둘레가 십 리나 넘는 바위를 묶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허나 동자승은 생글생글 웃으며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이튿날 마을 장정들을 수십 명 사서 새끼를 꼬게 했다.
스무날쯤 지나 새끼가 산더미같이 쌓이자 동자승은 소금을 몇 섬 물독에 풀어 새끼에다 염국을 들였다. 그리고 나서 청년들을 데리고 울산바위에 올라가 바위둘레를 새끼로 매는 것이었다.
그리곤 이삼 일 후 다시 바위에 올라가 새끼에 들기름을 바르더니 거침없이 불을 붙였다.
기름 묻힌 새끼줄은 잘 탔지만 소금물에 절였으므로 겉만 그을려 꼭 재같이 보였다.

동자승의 기지는 놀라웠다. 감쪽같이 불에 탄 재로 그 큰 바위를 묶었으니..
『제 놈들이 감히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원님은 약속된 날 바위세를 받아갈 마바리까지 끌고 왔다.
새파랗게 질려 바칠 줄 알았는데 태연한 채, 어서 바위를 끌어가라는 말에 원님은 내심 놀랐다.
『이놈들 거짓말을 해도 분수가 있지 나를 놀리려 드느냐?』
『가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원님은 망신을 무릅쓰고 울산바위까지 올라갔다.
이게 웬일인가. 정녕 불에 탄 새끼로 칭칭 감아 놓은 것이 아닌가.
『허, 그놈들 꾀가 대단하군. 이제 바위세 받긴 다 틀렸구나.』

그 이후부터 신흥사는 지긋지긋하던 바위세를 물지 않게 되었다.


최세영 18-11-01 13:52
답변  
ㅎㅎ
이거 인형극장에서 연출해도 재밋겠다
     
와이리 18-11-01 14:48
답변  
엣날부터 내려오는 전설을 보면
어찌 그리 거짓말을 진짜인 양, 입술에 침도 안바르고 했는지....... ㅎ
와이리 18-11-01 23:51
답변  
미시령은
금강산과 설악산을 구분하는 고갯길이다.
(미시령 휴게소는 이미 문 닫았고, 지금은 새로운 건설 공사 중이더라)

미시령에서 휴전선까지 남한에 속한 금강산에는
위로부터 인제군 향로봉, 칠절봉.. 고성군의 마산봉, 상봉, 신선봉 다섯 봉우리가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속하는 봉우리란다.
향로봉을 제외하고 네 봉우리는 등산로가 개방되어 있단다.

남한에 속한 금강산의 사찰로는
고성군 거진읍의 건봉사와 토성면의 회엄사가 금강산 팔만구암자에 속하고 화엄사는 가장 남쪽에 위치한 금강산의 사찰이란다.

山 좋아하는 동기들은 한번 가 보시라~

건봉사는
일제 강점기까지 우리나라 4대 사찰(통도사,해인사,송광사,건봉사)중의 하나였다고 하며, 임진왜란때 사명대사께서 의승병을 일으킨 곳이라고 한단다.
海印 18-11-03 08:02
답변  
와이리 亦是 아는 것이 만타.

===> 건봉사는
일제 강점기까지 우리나라 4대 사찰(통도사,해인사,송광사,건봉사)중의 하나였다고 하며, 임진왜란때 사명대사께서 의승병을 일으킨 곳이라고 한단다.

위 내용도 오늘 알았다. 그저 늘거주글때 까정 공부 또 공부 일신새일신이 좋고 즐겁기만 하다라고라~~~ㅎ~~~

海印導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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