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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4-17 12:52
康健한 長壽 秘策 無料 公開~~~ㅋ~~~
 글쓴이 : 海印
조회 : 674  

중국의 주자{(유학의 아버지 주자는 남송의 유학자 주희(朱熹)의 존칭으로, 그는 송 대의 유학을 집대성하여 완성시켰다. 그의 학설은 “공경을 기본으로 삼아 그 근본을 확립하고, 이치를 끝까지 연구하여 경지에 이른 후, 자신의 입장에 대입하여 생각하고 실천해야 한다.”라는 개념이 중심으로, 명·청 시대 유학의 정통으로 자리 잡았으며, 그의 사상과 저술, 교육론은 조정과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공자와 맹자 다음으로 숭배되었고, 풍부한 독서와 세밀한 분석을 중시하는 그의 학풍은 후세 학자들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 등의 주변 국가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주자는 아버지 주송(朱松)의 부임지였던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에서 그와 축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희(熹)이며, 자는 원회(元晦) 또는 중회(仲晦)이고, 호는 회암(晦庵)이다. 다섯 살에 《효경》을 배웠으며, 사색을 즐겨 하늘 저 끝에 과연 무엇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기도 했다고 한다.

당시 대과 급제자들의 연령은 평균 서른다섯 살이었으나, 그는 열여덟 살에 진사과에 급제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1151년에는 이부(吏部)의 임관시험에도 합격하여 천주(泉州) 동안(同安) 지방의 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부임지로 향하기 전 유학자 이동(李侗)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1153년에야 비로소 부임했다. 성리학의 정통 후계자였던 이동에게서의 수학으로 그는 마침내 주돈이(周敦頣), 정호(程顥), 정이(程頣) 등의 사상을 이어받게 되었다.

1162년 효종이 즉위하면서 치국에 대한 방책을 논의할 것을 명했다. 주자는 상서를 올려 문학을 배척하고,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의 이치를 규명하기 위해 지식을 닦는 일)와 성의정심(誠意正心,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가짐)을 주장하며 이학(理學)으로서 황제를 보필하고자 했으나 채택되지 못했다. 1163년 그는 다시 격물치지를 진언했으며, 금나라가 침입하여 조정이 주전과 주화의 두 파로 나뉘자 주화의 폐단을 들면서 주전의 입장을 강력히 밝혔다. 그러나 그는 점점 더 가열되는 파당 정치에 염증을 느껴 더 이상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저술과 강학에 전념했다.

주자는 정이의 “천지 간에 존재하는 이(理)는 유일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만물에 존재한다.”라는 사상을 공부했으며, 장식(張栻)과 교제하면서 심성론(心性論)을 확립했고, 여조겸(呂祖謙)과 교류하면서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의 주장을 담은 《근사록(近思錄)》을 편찬했다. 한편 그는 여조겸의 주선으로 육상산(陸象山)을 만나 학문을 통해 만물의 본질을 깨닫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주장하면서 치열한 학문적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1178년 주자는 남강군(南康軍)의 지주에 임명되었고, 그곳에 백록동 서원을 다시 세워 육상산 등의 명사들을 초빙하여 강학을 실시했다. 당시 서원은 사립학교 같은 개념으로 관립학교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한 예비학교였던 것에 비해 진정한 학문 연구를 목적으로 설립된 곳이었다.

주자는 민생을 걱정하는 정치가이기도 했는데, 1181년 상평차온공사가 되었을 때는 마을에 곡식창고인 사창을 설치하여 춘궁기에 구제미를 대여해 줌으로써 쌀값을 안정시키고 백성들이 무사히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건의했다. 또한 장주(漳州)와 담주(潭州)의 지주를 지낼 때는 조세를 감면하고, 풍속을 개선하고, 학교를 세웠다.

영종이 즉위한 후 주자는 시강으로 발탁되어 《대학》을 강술했다. 그러나 그는 태황태후의 친척으로써 권력가였던 한탁주(韓侂胄)를 비판하는 상소를 수차례 올렸다가 한탁주의 눈에서 벗어나 불과 45일 만에 파직되었다. 한탁주는 주자를 수반으로 하는 학파를 ‘위학(僞學)’이라고 탄압하고, 주자를 따르는 무리 59명을 ‘위학당적(僞學黨籍)’에 기입해 박해했다. 그러나 주자는 1196년 관직을 그만두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학문을 계속했다. 1200년 주자는 몇 명 남지 않은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7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죽은 뒤 ‘문(文)’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1227년 태사로 증정된 후 휘국공에 봉해졌으며, 1241년 공자의 사당에 모셔졌다.

주자는 공자 이후 경전에 주석만을 다는 훈고학적 유학의 한계를 탈피하고 개인의 수양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 통치의 기반이 되는 학문으로 재탄생시켰다. 한편 그는 북송 시대 주돈이, 정호, 정이, 장재, 소옹 등 유학자 다섯 명의 사상을 종합하여 발전시켰다. 그는 우주 만물은 ‘이(理)’와 ‘기(氣)’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와 기는 온전한 하나로 따로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한편 인간의 본성은 선한 이가 일어나서 나타나지만 불순한 기로 인해 악해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이와 기로 이루어진 우주와 만물은 태극에 의해 생성되고 움직이며, 만물은 각각의 태극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이 각각의 태극은 각자 완전하다고 했다.}

가 이르기를 <배우지 않으면 곧 늙고 쇠해진다>라고 읊어 제꼈겠다라고라~~~ㅎ~~~

이 말을 거꾸로 판단하자면 이렇다.

늙을수록 많은 공부를 하면(특히 조건?이 있다. 그것은 이렇다. 즉, 개인적인 체력과 기호에 걸맞는 한도에서)~~~~~ㅎ~~~

즉, 강건한 장수를 할 수가 있다는 결론을 추론할 수 있다라고라~~~흠~~~

海印導師. 拜上.


海印 19-04-18 10:20
답변  
~~~乙酉日 좋은 日辰이로다.~~~흠~~~

그래서 좋은 말을 퍼 와서 올린다.

즉, 사람은 사랑함으로써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이 시작되며(생구라성 뻥 냄새가 짙게 나지만, 깊이 생각해보면 일리가 있다)

다른 사람과 고무神을 사랑하는 순간부터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

海印導師.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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