葬說 : 명당설(明堂說)의 허실(虛實)저자 김주신 글을 발췌하여 기록하다.
대저, 선한 자에게 복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화를 내리는 것이 천도(天道)의 대원칙이라 한다. 그러나 선한 자가 도리어 일찍 죽거나 곤궁하게 살고, 악한 자는 오히려 오래오래 영화를 누리며 잘살기도 한다.
현자(賢者)를 등용하고 사악(邪惡)한 자를 물리치는 것이 왕정(王政)의 기본이다. 그러나 정직한 도로 충성을 다해도 반드시 대가를 보답받지는 못한다. 그런가 하면 소인(小人)은 항상 등용되어 죄를 저질러도 때로는 벌을 받지 않기도 하는데 군자(君子)는 언제나 쫓겨나니, 천리(天理)와 인간사(人間事)를 무엇을 가지고 징험하며 어떻게 믿겠는가?
후세에 이러한 현실을 답답하게 여긴 나머지 길흉(吉凶)과 궁달(窮達)의 원인을 땅에다 돌리어, 어버이 무덤을 길지(吉地)에다 쓰면 그 자손이 부귀번창하고 흉지(凶地)에다 쓰면 자손이 빈천하고 번창하지 못한다 하니, 온 세상이 앞을 다투어 마치 집을 이사하듯이 묘지를 옮겨서 웬만한 산은 온전하게 남아나지 못하게 되었다.
내 비록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하늘이나 땅이나 사람이나, 이치는 모두 같다는 것만은 안다. 위로는 하늘이 엄연한 위엄을 지니고 있지만, 이처럼 화(禍)와 복(福)을 선과 악의 구분없이 내리고, 아래에는 군주(君主)가 상벌권(賞罰權)을 확실하게 쥐고 있지만 이처럼 정상적이지 못하다. 그런데 하물며 가장 아래에 위치하여 이것저것 잡된 것이 섞여있는 아무 생명력 없는 땅이 어떻게 죽은 조상의 뼈를 빙자하여 사람에게 복을 주거나 화를 주는 것이, 위에 있는 하늘이나, 확실하게 상벌권을 쥐고 행사하는 군주보다도 더 분명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선유(先儒)의, 조상이 편해야 자손도 편하다고 한 말은 사리를 미루어서 잘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일을 들어서 대강을 살펴보자. 세상에 어떤 사람이 십 년간 감옥살이를 하면서 추위와 더위에 모진 고생을 하는 사람이 있는 경우나, 또는 저 멀리 변방으로 귀양을 가서 풍토병에 갖은 고초를 끝없이 겪고 있는 조상이 있다고 치자. 그 자손은 그로 인하여 항상 가슴을 에이는 고통을 받으며 살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꼭 죽어 없어지지는 않는다. 어떤 경우는 건강을 누리며 장수하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현달하여 부귀를 누리고 매일같이 잔치를 벌리며 즐겁고 편안하게 지내는 집안이라도 그 자손이 꼭 다 편안하지는 못하고 전염병에 시달리고 죽기도 한다. 이러한 논리로 논한다면, 살았을 적에도 자손의 안위(安危)는 내 몸의 안위와는 관계가 없는 것인데, 어떻게 죽어서 내가 편해야 자손이 편하고 내가 위태로우면 자손도 반드시 위태롭게 된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이는 살았을 때의 이치를 가지고 따져보면 알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자식된 자의 도리로서는 할 수 있는 정성을 다 해야 되는 것이다. 따라서 화복(禍福)의 유무(有無)는 논할 것 없이 나라에서는 금하는 곳만을 피하고 바람 닿지 않고 양지 바른 곳 그리고 토질이 보송보송하며 윤기가 있는 곳에다 묘를 쓰고 그런 뒤에는 꼴 베고 소 먹이는 자들이 함부로 범하지 못하게만 잘 관리하면 그만이다. 구차하게 화복의 설(設)에 동요되어, 선령(先靈)을 편안하게 모시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여기저기 묘를 옮긴다면 그 마음은 이미 조상보다도 자기 자신을 앞세운 잘못을 범한 것이다.
가령, 지리(地理)가 과연 분명 있고 천리(天理)가 있다면 그러한 사람에게 어찌 복을 내리겠는가. 송(宋) 나라 유현(儒賢)은 "인생의 부귀와 빈천은 타고난 천품에 정해진 것인데 어떻게 무덤속의 말라빠진 뼈다귀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만일 풍수지리를 주장하는 사람의 말대로라면 이는 하늘의 명(命)이 도리어 한 줌 흙에 제어를 받는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아, 너무나도 지당한 말이다. 어찌 지금 세상에 약석(藥石)이 되는 말이 아니라 하겠는가. 2019.11.02.08:10경 海印道師 퍼 와서 기록하다.
[김주신(金柱臣: 1661(현종2)~1721(경종1)) 자는 하경(廈卿), 호는 수곡(壽谷)․ 세심재(洗心齋). 본관은 경주. 판서 남중(南重)의 손자. 생원 일진(一振)의 아들이다. 박세당(朴世堂)의 문인으로 1696년(숙종 22)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장원서별검(掌苑署別檢)이 되었다. 1702년(숙종 28)에 딸이 숙종의 계비가 되자 돈령부 도정에, 그리고 이어 영돈령부사에 이르고 경은부원군(慶恩府院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효간(孝簡)이며, 저서로는 『수곡집(壽谷集)』등이 있다. 이 글은 「수곡집(壽谷集)」 권일(卷一)에 있는 것으로 원제는 '장설(葬說)'이다.]
海印導師. 오늘 이곳에 올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