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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2-03 07:01
미녀 왕소군
 글쓴이 : 海印
조회 : 266  

한(漢)나라 국운 처음에는 융성했으니
조정에는 무신도 넉넉했다네
어찌 꼭 박명한 여인이
괴로움을 겪으며 먼 곳까지 화친하러 가야 했던가

漢道初全盛
朝廷足武臣
何須薄命妾
辛苦遠和親

흐르는 눈물 가리고 단봉성을 떠나
슬픔을 삼키며 백룡대로 향하네
선우(單于)는 놀라 기뻐했으나
더 이상 옛날의 그 얼굴 아니었다네

掩涕辭丹鳳
銜悲向白龍
單于浪驚喜
無復舊時容

오랑캐 땅엔 꽃도 풀도 없어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
옷에 맨 허리끈이 저절로 느슨해지니
가느다란 허리 몸매를 위함은 아니라오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
自然衣帶緩
非是爲腰身

- 동방규(東方) 〈소군원(昭君怨)〉 삼수(三首)

왕소군(王昭君)의 슬픈 사연을 노래한 당(唐)나라 시인 동방규의 시 〈소군원〉에서 ‘춘래불사춘’이 유래했다.

왕소군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한서(漢書)》의 〈원제기(元帝紀)〉와 〈흉노전(匈奴傳)〉, 그리고 《후한서(後漢書) 〈남흉노전(南匈奴傳)〉》에 간략하게 보이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다듬어 놓은 왕소군의 슬픈 이야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한(漢) 원제(元帝) 건소(建昭) 원년(BC38), 전국에 후궁을 모집한다는 조서를 내렸는데, 전국 각지에서 선발되어 입궁한 궁녀들의 수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이때 왕소군(본명 왕장(王嬙))도 18세의 나이에 후궁으로 선발되었다. 황제는 수천 명에 이르는 궁녀들의 신상을 일일이 파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모연수(毛延壽) 등 화공들에게 궁녀들의 초상화를 그려 바치게 했다. 부귀한 집안 출신이나 수도 장안에 후원자가 있는 궁녀들은 화공에게 자신의 모습을 예쁘게 그려 달라고 뇌물을 바쳤으나, 왕소군은 집안이 빈천하여 아는 사람도 없는 데다 자신의 용모를 황제에게 속일 마음이 없었으므로 뇌물을 바치지 않았다. 모연수는 뇌물을 바치지 않은 왕소군의 용모를 형편없이 못생기게 그려버렸다. 왕소군은 입궁한 지 5년이 흐르도록 황제의 얼굴도 볼 수가 없었다.

원제 경녕(竟寧) 원년(BC33), 남흉노의 호한야(呼韓邪) 선우가 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으로 왔다. 호한야는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지고 와서 원제에게 공손하게 문안을 올렸다.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 선우를 환대했다. 호한야는 원제에게 황제의 사위가 되고 싶다고 청하였다. 원제는 그의 청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과시하고 싶어 자기 후궁 중에서 아직 총애를 받지 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했다. 궁녀들이 들어오자 호한야는 다채로운 모습에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그중에서 절세의 미인을 발견하고는 즉시 원제에게 또 다른 제의를 했다.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미녀들 중의 한 명이어도 괜찮습니다.” 원제는 원래 종실의 공주들 중에서 한 명을 택하려고 하였으나 이제 궁녀들 중에서 한 명을 선발한다면 번거로움을 피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호한야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하였다. 호한야는 왕소군을 지목했다. 너무나 아름다운 왕소군의 미모에 원제도 그만 반하고 말았다. 그러나 황제로서 한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 수도 없었다.

원제는 연회가 끝난 후 급히 돌아가서 궁녀들의 초상화를 다시 대조해 보았다. 왕소군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너무 다른 것을 발견한 원제는 모연수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명령하였다. 모연수는 결국 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되었다. 원제는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리라고 속이고는 조용히 왕소군을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 밤 사흘 낮을 함께 보냈다. 3일 후, 왕소군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작별을 고하였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다.

왕소군은 흉노 땅에서 그곳 여인들에게 길쌈하는 방법 등을 가르쳤고, 한나라와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하여 그 후 80여 년 동안 흉노와 한의 접전은 없었다고 한다. 호한야 선우가 죽은 후, 호한야의 본처 아들인 복주루(復株累) 선우가 왕소군을 취하려 하자 왕소군은 한나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성제(成帝)에게 서신을 올렸으나 성제는 흉노의 습속을 따르라고 명했다. 왕소군은 다시 복주루의 연지(閼氏, 선우의 황후)가 되어 딸 둘을 낳았다. 왕소군이 죽은 후 그 시신은 대흑하(大黑河) 남쪽 기슭에 묻혔다. 왕소군의 묘는 내몽고 후허하오터(呼和浩特) 남쪽 9킬로미터 지점에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가을에 접어든 이후 북방의 초목이 모두 누렇게 시들어도 오직 왕소군 무덤의 풀만은 푸름을 잃지 않고 있기 때문에 ‘청총(靑塚)’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서경잡기(西京雜記)》에 나온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왕소군이 흉노를 향해 떠나갈 때 마지막으로 장안(長安)을 한번 바라본 다음 가슴에 비파를 안고 말에 올랐다고 한다. 왕소군 일행이 장안의 거리를 지나갈 때는 구경 나온 사람들이 거리를 꽉 메웠다. 왕소군이 정든 고국산천을 떠나는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말 위에 앉은 채 비파로 이별곡을 연주하고 있는데, 마침 남쪽으로 날아가던 기러기가 아름다운 비파소리를 듣고 말 위에 앉은 왕소군의 미모를 보느라 날갯짓하는 것도 잊고 있다가 그만 땅에 떨어져 버렸다고 한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왕소군의 미모를 ‘낙안(落雁)’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왕소군에 대한 이야기는 후세 사람들의 입에 끊임없이 오르내리면서 시가, 소설, 희곡 등의 각종 문학 양식을 통해서 그 형상이 끊임없이 재창조되었다.

海印導師. 퍼 와서 기록하다.


海印導師 20-02-03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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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어 스팔 그림그리는 화공이 무슨 죄가 있다고해서리~~~하긴 뢰물을 받아 처먹은 잘못을 쬐금 있구만서도~~~ㅋ~~~화공 모연수만 조때부렀다라고라~~~ㅋㅎㅎㅎ~~~

근께 자신의 분수도 잘 모르고서리~~~쥐약인지 된장인지 변인지 잘 구별하지 못하고 타인의 주는 뢰물을 함부로 쳐먹으면, 꼭 그렇게 설사(목이 뎅겅)를 한단 말일세~~~그것이 운이 좋을 때는 기냥기냥 지나갈 것이고 꼭~나쁘게 적용할 당시에 불행이 닥치게 되어 있지라~~~ㅋ~~~

한(漢) 원제(元帝) 그새끼 왕소군와 삼일 밤낮 동안 거시기질을 했으면, 몇 번이나 했을까? 궁금키는 한데~~~ㅋ~~~

인간이란 종자가 말이다. 수천명의 궁녀가 있을지라도, 그중 한 명 즉, 내 것 빼앗기는 심정으로 존나게 조껍떼기 배깨질때까정 했겠지랄~~~ㅋㅎㅎㅎ~~~

~~~흠~~~
海印導師 20-02-03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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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말씀이다.

뢰물을 받아 처먹는 놈의 전형적인 처세가 바로 (내로남불식의 처세관)방식이다.

지가 받아 처먹은 것은 몇 천만원 값나가는 승용차도 작은 거래상의 선물일 뿐이고, 타인의 5천원이나 일만원 작은 돈을 받는 것은 뇌물이라고해서, 징계를 하고, 면직처분을 해제끼더란 말일세. 망할 썩어질놈의 종자같으니라구~~~흠~~~

海印導師.  씀.
영남이 20-02-06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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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4대 미인

'폐월(閉月) 초선
초선을 본달도 부끄러워 모습을 가렸다네요~~

낙안(落雁) 왕소군(王昭君)
왕소군이 부르던 노래에 날라가던 기러기가 떨어졌다고 하네요~~

수화(羞花) 양귀비(楊貴妃)
양귀비를 본 꽃들이 부끄러워 갑자기 잎이 마르면서 꽃이 오므라들더라 가죠~~

침어(侵魚) 서시(西施)
서시의 아름다움에 놀란 물고기가 헤엄치지 않고 가라앉았다는 거죠~~~

이 중에서도 나는 왕소군이 최고의 미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황제와 국민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기꺼이 자진해서 희생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
海印導師 20-02-06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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짱께국(동방국으로써, 천하통일국가를 이뤄낸 종족으로 치면, 최고다)의 역대 4대 미인을 영남이가 잘 설명하였구나.

인간이고, 자연이고, 태초의 원초적 지향점이 바로 ===>아름다워지고자 하는 욕망일진대, 미녀에게는 최고의 찬사를 주어야 한다.

설령, 한 때의 미모를 자랑하다가, 이제 고혼이 된 역사속의 미인일지라도~~~기록 속에서 영원하게 칭송하고 추앙해도 별 모자람이 없다.

다만, 초선은 초선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 소설책인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등장하는 가공의 캐릭터이다. 이 책에는 초선이 한 왕실의 중신인 사도(司徒) 왕윤(王允)의 가기(歌妓), 현대 사회의 시각에서 해석하자면 높은 벼슬아치인 왕윤과 원조교제하던 가수 지망생이었다. 아주 예쁘고 총명한 여자로 왕윤이 아예 수양딸로 삼아서 공공연하게 동거하고 있던 중이었다.

연의에서는 동탁이 권력을 잡은 후 황제를 무시하고 전횡을 일삼자 왕윤은 먼저 조조에게 황제의 뜻이 담긴 칠성검을 주어서 그의 암살을 시도하지만 실패한다.
~~~이하 생략) 비록, 소설 속의 캐릭터일 뿐이지만, 어놈 저놈을 거치면서 이용만 당한 미인의 불행을 상징해서 진짜로 별로일 뿐이고~~~ㅋ~~~

양귀비는 용모보다도, 타고난 분수를 잘 모르고, 사통질과 권력에의 끝없는 욕망을 불태우다가, 꼴 사납게 비참하게 죽었기 때문에 그냥 보기에 좋은 육덕 풍부한 고기 덩어리였다고 본다.

서시는 아릅답지만, 지나치게 갸냘픈 인상을 주어서리, 약간 적당하게 풍부함의 육체를 선망하는 海印導師의 탐닉과 관심 대상이 아닌 그야말로 그림속의 미인이로다.~~~ㅎ~~~

왕소군!!!
그녀가 북방의 오랑캐(짱깨 새끼들 한반도인 조차 동이족, 즉 동방의 오랑캐로 부르니)라 지조꼴리는대로 짖어대니까는~~~ 북방의 강력한 민족이라는 표현이 더욱 적절하다.

중국에서는 정치적인 훌륭한 美女 왕소군 때문에 그후 약 80여년 동안, 북방의 강력한 민족과 전쟁이 없었고, 평화를 유지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까는~~~왕소군이야말로, 짱께국가 황제를 능가하는 皇后格 인물이었다고, 海印導師도 영남이의 견해에 찬성한다.~~~흠~~~

이하, 왕소군에 대한 실제적인 평가를 내린 모 글쓴이의 추정생각을 올린다. 즉, 낙안(落雁) 왕소군(王昭君)은 전한의 9대 황제인 선제(宣帝) 시절의 인물이다. 선제 원년에 한나라의 황실에서는 공주 한 사람을 북방 훈족각주1) 의 군주인 호한야 선우(呼韓耶 單于)에게 시집보내야 할 형편이었다. 선제는 자신의 혈육 대신 멀리 보내도 슬프지 않을 것 같은 후궁들 중에서 한 명을 보내기로 했다. 당시는 선제 원년.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황제는 수많은 궁중의 여자들을 일일이 기억하고 있지 못했으므로 화공 모연수(毛延壽)에게 그들의 화상을 그려 바치게 해서 하룻밤 은총을 베풀 대상을 고르곤 했다.

그러자 황제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일에 목숨을 건 여인들은 모두 모연수에게 뇌물을 써서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려 주도록 부탁했으나 평범한 집안 출신의 왕소군은 그러한 재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녀에게 삐친 모연수는 왕소군의 초상을 가능한 한 평범하게 그리고 얼굴에 큼직한 점까지 하나 찍어 놓았다. 당연히 왕소군은 열다섯 살에 입궐해서 3년 동안 황제의 총애를 받기는커녕 얼굴 한 번 보지 못하고 있었다.

선제는 모연수가 그린 초상화들을 보고 그중에서 훈의 선우에게 넘겨도 아깝지 않을 평범한 여인을 골라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왕소군이었다. 왕소군이 떠나는 날에야 그녀를 처음 본 선제는 땅을 치고 후회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는 화공 모연수를 참형에 처하는 것으로 울분을 풀었다.

일설에 의하면, 선제는 왕소군을 보내기 전에 혼수를 준비한다는 구실로 시간을 벌어서 그녀와 사흘 동안 동침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絶世佳人을 훈족에 보낸 사실을 무척 배 아파하던 훗날의 중국 역사가들이 슬그머니 추가한 기사로 보인다. 선제 자체가 여자를 주면서 전쟁을 방지하려는 쪼잔한 종자였기에 그런 대담한(왕소군와 삼일 밤낮기간 떡치는 정사) 일을 벌일만한 인물이 못 되었으며, 그즈음에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는 훈족의 족장 호한야는 황궁에 머물고 있었다. 여러 번 통혼을 한 한 왕실과 훈족 왕실 사이의 긴밀한 관계로 미루어 볼 때, 이런 처사가 있었다면 즉각 호한야 선우에게 보고됐을 것이고, 이를 안 호한야는 당장 선제를 두동강 내버렸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로다.  끝.

海印導師.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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