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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6-28 00:12
한중 예술교류단 여행 기행문
 글쓴이 : 김일호
조회 : 179  
한중 예술교류단 여행 기행문

(이 글은 2010년 겨울, 경주고 은사였던 서영수 경주예총 회장 (시인)을 모시고 한중예술교류로 갔던 기행문이다. 기행문을 쓰라는 선생님의 지시로 여행 내내 메모지를 들고 사실에 충실했지만 예총지에 기고된 분량은 지면 관계로 원본의 반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이미 다 가보셨겠지만 기억을 되살려 보라고 다소 길더라도 그냥 심심풀이 하라고 원본을 다 싣는다.)


-. 2010년 10월 15일 15;49 ( 현지 시각)
비행기가 베이징 공항 하늘을 선회했다.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광활한 중국, 비행기로 한참을 날았는데도 산이 보이지 않는 붉은 땅이다. 두부모같이 경지정리가 된 농지와 똑같은 모양의 집들이 모여져 있었다. 집단농장 같은 느낌이 든 것도 잠시였다. 공룡 같은 중국 땅에 발을 내려놓았다.
하늘이 잔뜩 흐려져 있었다. 스모그 같은 안개로 땅의 끝이 보이지 않는 중국의 날씨가 맑은 날이 거의 없다는 가이드의 말은 들으며 갑자기 한국의 쾌청한 하늘이 그리워졌다.
공항에서 기차를 타고 국내선 공항으로 이동했다. 중국에는 이런 공항이 4개 있는데 너무 커 국제선 터미널에서 국내선 터미널로 기차로 이동한다. 중국에서 기차=버스, 이고 열차=화차라고 한단다.

서안 인동공항에 도착했다. 피켓을 들고 기다리는 가이드는 조선족 출신인 조씨라며 자신을 조 따그라고 부르면 된다고 했다. 중국말로 조따그 시팔노마 = 조형 아침드셨습니까? 라며
그의 섬서성 소개로 이어졌다. 중국은 대만을 포함한 23개의 성으로 4개 직활시와 5개의 자치구로 구성되었으며 이 곳 섬서성만 해도 한국 남북한을 합한 것 보다 크다고 했다. 연 평균 400mm 이하의 강우량으로 비교적 건조한 편이라 옥수수와 밀농사 위주의 밭농사를 지으며 해바라기 밭으로도 유명하단다. 당연히 밀가루 음식인 만두, 호떡, 국수 등이 유명하여 300여 가지의 음식이 발달되어 있다. 호떡 크기가 150키로나 되는가 하면, 국수 굵기가 허리띠 만하며 국수 그릇이 아이가 목욕해도 좋을 만큼 큰 것도 있다 한다. 큰 나라만큼 과장도 엄청나다.
서안은 중국의 중앙 관중평야에 세워져 호경 ,함양, 장안이라고도 불렸으며 그리스 로마. 이집트와 함께 세계 4대 문화유적지이라고 한다. 또한 서안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의하면 실크로드의 출발점으로 중국 5000년 문명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도시로 1200년 동안 역대왕조의 수도였다고 한다. 우리 경주가 신라 왕조의 천년 수도였다면 서안은 여러 왕조가 흥망성쇠하면서 수도로 삼았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도 경주와 마찬가지로 3미터 이상만 땅을 파도 신고하고 발굴해야 한다고 한다.
- 10월 16일 조식 후 중국에서의 첫 나들이다, 그런데 비가 내리고 있었다. 부산하고 위도가 비슷하다는 데도 가을이라고 느끼기엔 초록이 가득하고 그러면서도 서늘한 날씨, 계절을 분간하기 어렵다. 비가 내리니 다들 걱정을 하는데 가이드는 장가계에서 맑은 날이거나 서안에서 비를 만나면 행운이라는 말이 있다며 이 비는 복비란다. 연강수량 400밀리 정도인 서안에서 비는 복비이고 여러분이 복을 데리고 왔다 한다. 그래서인지 출근하는 사람들 중 비를 맞으면서도 웃고 있었다. 한중 예술교류행사가 열리는 서안 역사박물관으로 이동하면서 조선족( 고려인)은 한국이 잘 사니까 56개 소수민족 중 제일 자긍심을 갖고 살며, 문자와 언어, 풍습까지 잊지 않고 사는 소수민족은 200만 조선족뿐이라며 중국 당국도 조선족을 제일 두려워한다고 한다. 거대한 중국에서 그나마 자긍심을 가지게 하는 말이다.-

아침 열시 복비라는 비가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측천무후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는 사자상이 있는 서안시 문화예술회관에서 한중예술교류 커팅행사가 있었다. 올 해가 한중 외교 수립 20주년이라 이번 행사가 더욱 뜻 깊은 이유라며 세세년년 이어지길 기원하며 경주예총 서영수회장님을 비롯한 한국 대표와 중국 문화단체장들과의 흐뭇한 단체 사진을 찍고 저녁 만찬을 기약하며 곧 이어 양국의 작품이 전시된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함께 간 서보영 서예가와 이옥희 화가의 작품 옆에서 사진을 함께 찍으며 한중 예술교류를 실감했다. 이어 협서성 고대문화 특별전을 관람했다. 협서성은 세계3대 문화발상지인 황하문명의 자취가 고대 은나라부터 주나라 시대까지의 순장문화가 고스란히 출토되어 전시되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찍다가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신기하고 놀라운 것이어서 마음속에 넣어두기로 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명성벽으로 옮겼다. 600년 전 명나라 시대에 축조했다는 명성벽은 둘레가 14키로나 되는 성으로 5대문을 통하여만 성내로 통할 수 있게 만든 세계 유일의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성이다. 중국 영화에서 봤음직한 성을 뒤로 하고 대안탑으로 갔다
대안탑은 법상종의 조종이며 소설 서유기의 삼장법사를 모신 탑으로 7층까지의 높이가 40미터인 모전탑으로 시대와 모양이 비슷한 경주의 분황사탑의 약 4배는 되는 것 같아 기단에서 꼭대기까지 벽돌의 숫자가 궁금해졌다. 그의 제자 원측 스님이 훗날 신라에 법상종을 전파했다고 한다.

오후 비림으로 향했다. 비림이라니 비석으로 숲을 이룬다는 뜻이 하나도 과장했다고 할 수 없는 비림은 그야말로 비석이 귀한 줄 모르고 지천이었다. 비석의 숲에 매달린 열매 같은 시어들이 매달려 있었다. 비림에는 한글로도 설명하고 있어 반갑고 좀 더 상세히 내용을 관람할 수 있었다, 경주에서 온 아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이 얼마나 방문하고 있나 실감하게 했다. 비림은 공자의 사당으로 오래 역사를 간직한 비석을 모아둔 중국 한자 서예 문화를 한 곳에서 볼 수 있어 놀라웠다. 우리나라 같으면 보물급은 될 것 같은 비석이 천덕꾸러기인 듯 방치되었는걸 보며 보물도 많으니 귀한 줄 모르는구나 하는 부러움이 났다. 중국은 천혜의 자연 자원은 물론 풍부한 지하자원 과 함께 수천 년의 역사문화유산에다 광할한 땅 ,인구까지 모두가 부러울 뿐이다.
비석 중에는 당 현종의 친필로 된 비석이 있는 데 효경을 쓴 것으로 13경에 114석 228면으로 65만자를 새겨놓은 것으로 옛날 과거시험에 필수교과서라고 한다. 왕희지, 안진경체 등 익히 들어 왔던 필체를 한 곳에서 볼 수 있어 감명 깊었으며 기원 전 수 천 년부터 문헌이 전해내려 와 문헌이 거의 없는 한국을 생각하니 너무 부러웠다.
비림 한 켠에 경문종이라는 711년에 주조된 종이 있었는데 서안에는 우리나라 보신각 종과같이 새해에는 울린다고 한다. 종루에는 포뢰라고 하는 고래를 만나면 우는 상상의 동물을 상감한 종두로 종을 매달아 두고 있었는데 그 무거운 종을 매달아두려면 특수한 함급술이어야 하는데 현대의 주조기술로도 불가능 하다고 한다. 경주의 에밀레종이 생각났다. 무늬나 규모 등이 에밀레종이 월등함을 느끼며 처음으로 우리민족의 자긍심을 생각나게 했다.
비림 밖에는 선대 명필의 후손이 관광객들에게 휘호를 써주고 있었다.

10월 16일 18;30분 중국 서안시 문화관계자와의 만찬이 이루어졌다. 끓임없이 권하는 마오타이주 무슨 뜻인지 모르는 무언의 대화 속에서 붉그레지는 모습으로 우리 양국의 우의를 다지며 서안에서의 둘째 밤을 맞고 있었다.

-. 10월 17일 중국 사흘째

서안 진시황제의 무덤 터를 향하면서 아카시아를 가로수로 쓴 것을 묻자 한 시인의 말로는 봄이면 노란 꽃이 핀다는 아카시아 향기는 어떨까 하면서 가이드에게 무슨 나무냐고 하니. 꽃 대신 금이 달린다면 모르지만 사는데 급한 나는 꽃이나 나무에 관심이 없다고 한다. 한국관광객들이 꽃과 나무에 대해 자주 묻는 것을 보면 먹고 살기에 바쁜 사람과 놀러 다니는 사람의 감정구조가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진시왕의 무덤은 1974년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 발견된 유적으로 중국의 또 하나의 불가사의를 보는 듯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둘레가 6km, 높이 70m 인 그냥 측백나무 등이 이 자라는 산봉우리 같은 황릉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다 병마와 토용으로 순장을 대신하여 묻어 진시왕이 생전의 아방궁을 지하에 재현한 것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그 깊이는 지하 50m 까지로 현재 발굴된 것은 186개 갱 중에서 1개일 뿐이라 하니 그 규모가 짐작하기 믿기 어려웠다. 진시황제는 13살에 등극할 때부터 무덤을 만들기 시작하여 50살에 죽고 그 다음 해 까지 무덤을 만들었다고 하니 실로 37년이나 걸린 거대한 역사였지만 장생불로를 꿈은 겨우 50으로 마감했다하니 그야말로 허망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국가 재정의 3분지1을 드려 만든 지하 무덤 갱은 때문에 진나라는 불과 3대 만에 망했지만 오늘날 세계로부터 관광객을 불러들여 후손들에게 관광대국의 시혜를 베풀고 있는 것 같은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함께 발굴된 2200년 전 청동검이 형상복원의 능력이 있어 발굴시 구부려진 검이 저절로 펴지고 종이 6장을 벨 정도로 날카롭다고 하니 그 당시의 합금술은 현대의 포항제철도 할 수 없을 기술이라 상상하기 어려웠다

. 중국 방문 사흘째 우리는 고속열차를 타고 낙양으로 향했다. 500km라는 거리에 경주서 서울 보다 더 멀다는 거리감은 곧 가이드의 말로 무시되었다. 중국에서 500km는 밤에 옆집에 밤마실 가는 거리라 하니 방대한 중국 땅덩어리가 실감이 났다.
그 동안 우리를 안내해주던 조따그와 이별하고 역내로 들어가니 국내 열차를 타는데도 검색대에 짐을 올려놓고 휴대물을 전자검색한다. 개방되어 자유롭다고 하지만 어딘가 불안함을 떨치지 못하는 중국 공안의 눈동자는 어디선가 감시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낙양은 삼국지의 고향이다. 춘추전국시대 열강들이 패권을 다투던 전쟁지역이라 남아 있는 역사유물이 많지 않다고 한다. 나관중이 삼국지를 썼지만 실제로 이 지역에 실존했던 전쟁 영웅들의 이야기를 적은 것이라며 특히 낙양에서는 관운장을 신격화하여 숭배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일행은 관운장을 모시는 관림으로 향했다.
관림에 들어서자 자욱한 향내로 낙양사람들의 전통 민심을 느끼게 한다.. 사람 키만한 향을 두 개나 불을 붙이고 있는 부인이 있어 저 만한 향이면 값이 얼마냐 물으니 향 하나에 한국 돈 십 만원이나 한다고 하여 놀랐다. 관운장은 재물과 청렴의 상징으로 그 조각상에 옆에 시립한 신하가 주판과 저울을 들고 있었다. 관운장은 살아서는 장군이었지만 죽어서 신이 되어 황제가 쓰는 9렴주보다 많은 12렴주를 쓴 제왕으로 추앙받고 있었다.
측백나무 숲으로 덮여 있는 관우의 머리가 묻혀 있는 제단에 단추 구멍만한 시주함에 동전을 넣으면서 이번 여행이 무탈하고 즐겁기를 빌었다.
관림 밖 광장에 아침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현지인 몇이 나와 춤을 추고 잇다. 중국에는 광장에 누군가 나와 카세트를 틀어놓으면 한 둘 모인 사람들이 자연스레 붙잡고 춤을 추고 눈이 맞으면 바람이 난다고 한다.
광장 한 켠에 노인 부부가 길이가 두 발은 됨직한 팽이채로 팽이를 치고 있다, 서로 돌아가면서 채를 치고 있는 두 사람, 오랜 세월 궁합을 잘 맞추고 산 연륜처럼 팽이는 쓰러질 줄 모르고 우리들 마음까지 돌린다. 무척 평화로운 모습이다. 한기운 수필가와 김형섭 수필가가 팽이채로 몇 번 치니 팽이가 죽어 버린다. 두 사람이 머리를 끓으며 쎄쎄 하면서 두 손을 모은다,. 바쁜 일정 속에서 모처럼 한가로운 풍경에 우리들과 노부부가 활짝 웃는다. 등 뒤로 비추는 햇살이 달다.

관림을 나와 용문석굴로 갔다. 이 곳은 중국 3대 불교 유물로 서기 493년 전부터 석회석 암굴을 파서 석굴을 만들고 부처님을 안치 했다고 하는 유네스코에 등록된 문화유산이다. 둘레가 2km이고 높이가100m 정도되는 석회암 산에는 탑이 67개 불상이 10만 여개가 있다 하니 가히 불가사의한 숫자라 할 것이다. 굳이 비교하려면 경주 양북에 있는 골굴암을 수백개 모아두었다고 할까. 불상은 10cm에서 로사나불상은 높이가 17m나 되는 것 까지 무려 10만개나 된다고 한다. 문화 혁명 때 유물론의 소산이란 이유로 도굴과 파괴로 훼손되어 암굴만 있고 빈벽만 남아있는 곳이 많았다. 수 십 미터나 되는 암벽에 매달려 굴을 파고 수천 기의 부처님을 새겨 안치한 조각가는 망치질 한 손 한 손마다 무엇을 염원했을까? 석굴 옆을 흐르는 이하강을 따라 걸으며 인간 염원이 서역만리 저 끝에 걸린 무지개와 무엇이 다를까. 공연한 감회는 무슨 질투심일까? 봉선사 터가 있었다는 석굴 앞에서 수학여행 온 듯 한 중국 학생들이 사진을 찍는다. 뒤 배경을 장식한 로사나 불상과 그 옆에 시립한 나한들의 조각이 너무나 사실적이라 놀랍다. 선을 중시하는 고대 미술과 달리 인간의 모습과 흡사한 입체적이다 본존불이라 할 로사나 불상은 측천무후를 모델로 했다는데 가까이서보면 인자해 보이나 멀리서 보이면 표독스런 모습이란다. 누군가의 말처럼 부처 아파트를 나오며. 우리는 고묘박물관으로 갔다.

고묘 박물관은 BC 200년 전 한나라 때부터 수 ,당, 위나라 때까지의 무덤을 지하 한 자리에 모아 둔 곳이다. 무덤 속 집에 쓰인 유물은 거의 도굴되고 빈 집만 남아, 생활 도구는 남아 있지 않지만 문살 문양은 현재의 사찰 문양에 버금할 정도로 완벽하게 보존되어 아름다움과 벽화가 놀랍다. 묘실의 지붕 중 어떤 것은 호리병을 안에서 바라보는 것 같이 천정이 높았다. 무덤 속 방은 1-3개 정도의 방으로 꾸며져 있고 큰 것은 가족묘로 6개 까지 있었다.
무덤은 신분고하에 따라 그 모양이 각가지다. 부러운 것은 명문이 새겨져 있어 무덤 속 인물의 생을 짐작할 수 있다고 한다. 또 한 전시관에는 신발에 덮을 비닐을 싸서 싣고 들어갔다. 수천 년 전 국보급 벽화가 수십 점 그 당시의 선과 색이 거의 완벽하게 보존된 채로 우리의 눈을 크게 뜨게 하고 있었다.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중 동물은 낙타와 말 이외는 볼 수 없었다. 그 당시 이 동물들이 주된 이동 수단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병마 7필이 출토된 부조 앞에서는 그 생생한 말의 율동과 섬세한 묘사 앞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한국 가요에 있듯이 낙양성 십리 하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 이더냐....... 무덤을 보며 삶과 죽음이 그 누구도 비껴갈 수 없음을 말해 주는 듯하다.

낙양으로 말하면 현종과 양귀비를 빼놓을 수없다. 낙양은 수대에 걸쳐 여러 왕조의 도읍지로 화천지는 겨울 별장으로 유명했다. 경주 안압지 보다는 못할 것 같은 것은 나의 욕심일까. 왕과 왕비의 욕조가 화려하다. 섭씨 40도는 된다는 온천에 엎드려 손으로 받은 물로 눈을 씻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정직한 눈이 되기를 빌어 봤다. 화천지 수면을 무대로 한다는 중국 최대의 뮤지컬, 동양의 로미오와 쥴리엣, 장한몽을 못보는 것을 아쉬워하며 백거이가 지었다는 장한가 한 구절을 읽어 본다. 천하제일 미녀 양귀비의 동상에 아가씨들이 다닥 다닥 붙어 사진을찍고 있다.

처녀들이 양귀비 동상을 끼고 사진을 찍는다
천하제일 미녀는 싸늘한 대리석으로 남아 있고 오늘
한 처녀가 아름다운 꿈을 찍는다
화청지 능수버들만이 가는 허리를
교태스레 흔든다

비익조는 날개가 하나 밖에 없어 두 마리가 꼭 붙어 있어야 날 수 있고, 연리지는 두 몸이 자라면서 한 몸으로 붙어 일생을 마감한다는 시를 지어 현종의 마음을 쌌다는 양귀비도 안록산의 난에 의해 38살의 젊은 나이로 일생을 마감하니 부귀영화 일춘몽이라는 말이 여기서 생기지 않았나 싶다. 양귀비가 좋아하는 리쯔라는 과일은 남방에서 나는 데 싱싱한 체로 상납하기 위해 그 당시 사람 넷 값이라야 구할 수 있는 천리마를 다섯 마리나 죽여가면서 양귀비 입맛에 아부했다고 한다.
-
10월 18일 낙양을 떠나 소림사를 향했다. 소림사는 북위 문제 때 달마대사가 창건 한 것으로 오늘날 까지 불교 무술로 유명하다. 인구 약 30만 명이 되는 등봉시의 인구 중 10만 명이 소림사의 영향 아래 무술을 배우고 있거나 무술인이라고 한다. 넓은 연병장에는 무술을 단련하는 기합 소리가 끓이지 않고 있었다. 중국은 어디를 가나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로 발 디디기가 어려울 정도도 넘쳐나는데 입장료가 보통이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입장료가 우리나라 돈으로 2-3만원은 된다고 한다. 소림사는 기대와 달리 실망스러웠다,. 향 냄새로 가득한 고찰은 몰라도 쇼와 같은 무술시범에서는 물속에 젖은 불도가 서글퍼 보였다.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소림사 뒷산 숭산에 올랐다 중국 5대 악산이라는 숭산은 해발 1500m의 그리 높은 산은 아닌. 이제 막 단풍이 드는 보통 산이라는 생각은 케이블카에서 내려 산의 뒷 모습을 보고서야 벌어진 입이 내려 올 때까지 다물어 지지 않았다. 수 백 m의 기암절벽에 붙어 있다 해야 할 길을 걸으면서 현기증으로 낙화처럼 떨어질 것 같아 아래로 내려다보기가 무서웠다. 돌아갈 수밖에 없는 길의 막다른 지점에서 먼 산을 바라본다. 계곡 건너 절벽 위에 걸린 사찰에 구름이 걸린 듯 절벽 위에 거린 사찰이 절경이다,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다 스케치와 사진으로 남기고 아쉽게 돌아선다,

숭산 깍아지른 고봉 위에
외로운 절 한 채
천애 고도에 길은 없어
새들 만 아침 저녁 찾아
부처님 공양을 드리누나
소림사에서 태우는 향으로 태운 소원
지붕 위에 구름인 양
걸리었네

10월 19일 낙양에서 정주까지는 차로 2시간 거리 하남성의 성도인 정주는 인구가 우리나라 서울 인구와 비슷한 천만 명이란다. 신도시라 도시는 수십 층의 건물로 한창 개발 중인 도시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호텔에 여장을 푼 우리들은 이번 여행에서의 마지막 팀 파티를 했다. 포장마차가 있는 프라타너스 가로수 길에 나즈마한 의자와 탁자를 놓고 경주의 어제와 내일을 얘기하며 친교의 밤은 깊어 갔다. 우리는 벌써 중국의 향내 나는 음식에 익숙해져 갔고 농담으로 거리가 떠나갈 듯 친해져 있었다. 꼬치와 만두를 파는 포장마차 안주를 내느라 모처럼 뜨겁게 달구어져 가고 있었고 우리들 이야기도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밤 11시, 남은 사람은 서영수 회장님과 한 국장, 한기운 수필가 그리고 나 네 사람은 회장님과 사제지간이기도 한 고등학교 때의 추억과 예총의 내일을 얘기하며 밤은 깊어 갔다. 밤 한 시 어깨를 서로 메고 호텔로 돌아가는 뒷 잔등을 가로등이 웃으며 배웅하고 있었다.

정주는 가짜가 유명하다고 한다. 정주 술의 90%가 가짜라며 가이드가 죠크를 한다. 일본사람은 분해해보고 만들고 한국인은 사진을 보고 만들고 , 중국인은 전화만 듣고도 진품과 똑같이 만든다고 한다, 함남성 박물관을 들렀다, 중국 역사의 300년을 보려면 상해로 가고 800년을 보려면 북경으로 가고, 3000년을 보려면 서안으로 가야하지만, 8000년 중국 역사 전부를 보려면 장주로 가야한다 할 정도로 장주는 중국 고대 전설의 왕국 하, 상나라 때부터 도읍터가 있던 곳이란다. 8000년 전 인류 문화가 탄생할 즈음의 시대에 갑골 문자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한자의 모태인 상형 문자를 보며 놀라웠고 특히 사람 人자는 거의 현재의 모습과 차이가 없었다. 동물 뼈로 만든 피리는 8000년이 지났는데도 연주가 가능하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았다. 하나라부터 은, 주, 진으로 내려오는 중국 고대 왕조의 유물을 보며 광대하고 아득한 인류 문명에 감탄을 연신 자아내었다.

우리는 마지막 날 개봉으로 향했다, 개봉은 우리나라에서 방송된 포청천이 999년경에 다스렸던 고장으로 이 곳 사람들은 포청천의 청렴결백함에 마음으로부터 우러러 보는 청렴결백 공무원으로 본다. 실존 인물은 작고 흰 피부의 얼굴이었으나 엄중한 판관의 이미지를 위해 검은 피부에 장대한 체구에 이마에는 반달 표식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국화는 하남성의 성화라 마침 온 도시가 국화 축제로 토요일 휴일에 밀려나온 관광객들로
거리는 교통지옥이었다. 중국 운전사들은 용감한 것지 무식한 건지 끼어들지 못하면 한 바퀴도 굴리지 못하고, 역 주행도 예사라고 한다. 신기한 것은 어느 누구도 경적을 울리지 않고 그냥 들이미는 것이라 그나마 다행이라 한다. 그 교통지옥 속에도 국화 꽃 장식을 한 승용차들이 길 행렬을 맞추며 간다. 모두 벤츠나 BMW 고급 승용차 수십여 대가 시내를 돌고 있다. 오늘 길일이라 결혼 후 신랑 신부와 함께 하객들을 태운 행차란다. 세 시간 빌리는데 한국돈으로 20만원 정도하는 차를 수십 대 많으면 88대 (중국은 8자를 좋아한다고)나 빌려 호화 잔치를 벌이는 중이란다. 용정공원은 마침 국화 축제가 한창이다. 청나라 건륭황제가 지었다는 용정에 올라가니 보문 호수 보다 조금 큰 호수가 한 눈에 보이고 국화 향기 가득하다. 이 호수 아래에 옛 후 송 때 도읍이 묻혀 있다고 한다. 수 천 년 전 황하의 범람으로 토사에 묻힌 옛 도시가 있다 하니 로마의 폼페이오 라고나 할까. 먼 미래에 발굴될 또 하나의 중국 유적을 상상 해본다. 국화 꽃 거리에서 장정들이 관광객을 옛가마에 태우고 둘레를 몇 바퀴 도는 장면이 눈에 뛰었다. 마침 모녀가 정겹게 가마 속에서 웃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사진을 한 장 찍는다.

마지막으로 들르는 천하제일 탑 49m 높이의 모전탑인데 현판에는 대철탑이란다, 가이드의 말인즉 대동아 전쟁 때 일본의 공습에도 해를 입지 않아 대철탑이라고 한단다. 49m나 되는 탑을 자기처럼 구운 벽돌로 쌓은 사리탑 앞에서 한중 예술교단의 전 일정을 마쳣다. 모두 가슴에 예술의 불씨 한 점씩 갖고 갈 것을 믿으며 단체 사진에 포즈를 내 맡겼다. 김치·~~~~

-. 중국

공룡의 뱃속을 걸어왔다
꿈틀대는 공룡의 울렁임을
느꼈을 뿐
공룡의 온몸은 볼 수 없었다
그 곳이 공료의 발바닥이었던 지
머리였던 지
수 천 년 동안의 알에서 부화한
공룡이 거기 있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만져 봤다
내 핏줄 속 만주를 뛰어다니던
고구려의 공룡도 깨어났으면 했다

-끝.

와이리 20-06-28 01:12
답변  
잘 읽었나이다.
옛날 중국도 대단하지만, 지금의 중국이라는 나라........ 대단하다.
15억 인구를 먹여 살릴 능력이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대단하다.
북조선은 2,500만명도 제대로 먹여 살리지 못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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