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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5-15 07:29
갸의 행동이 이상(?)하다~~~
 글쓴이 : 海印
조회 : 1,308  
   https://www.youtube.com/watch?v=MfD45kdQvZY [87]
위에 관련 유투브 동영상을 올렸다.

己亥年 末境, 코로나-19를 全世界에 흩뿌려서 人類 最惡의 災殃을 招來한(?) 嫌疑를 받고 있는 따거 시진핑 惡漢을 만나러 가는 心情은 아마도 不安의 極度에 이른 程度로 推測할 수 있다.

事實 갸는 四柱 日辰이 辛丑日辰이다. 原來 大運의 進行 中, 日辰과 같은 年度가 되면, 肉體的 精神的으로 極度의 苦難과 疲弊가 뒤따를 수 있다. 아니면 重病에 시달릴 수도 있다. 所爲 兄弟를 自稱하는 者가 목숨을 노릴 수도 있을 可能性일 占친다.

머시라, PP를 보자니까는 심심하고~~~ 새로운 내용이 올라오지도 않고 해서리~~~ 몆 자 끄적였을 뿐이로다.~~~흠~~~

海印導師. 合掌.

海印 21-05-15 07:45
답변  
북한의 지도자가 미국과 최악의 대치상황을 초래하면~~~~

南韓의 立場에서 得이될까? 害가될까?

득이된다는 입장은 산괘요, 해가된다는 심정은 겸괘로다.

결국, 역사에서 보자면, 광해의 지혜(?)를 빌렸으면 하지만서도?~~~ 하긴, 광해는 일부 역사가들 때문에 명과 청의 관계를 적절하게 이용했다고, 호의적인 재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사건의 추이를 보면서 냉정하게 평가할 때는, 지나친 방탕과 동시에 왕의 자리를 빼앗긴 그야말로 할 말 없고, 무능한 천하의 병신 쪼다같은 쫄장부라고 판단할 뿐이다.

하여간에~~~적절한 선에서 북한의 정치상황이 흔들리지 않는 선이 小韓民國에도 이익이 될 것으로 전망할 뿐이로다.~~~흠~~~

海印導師. 合掌
海印導師 21-05-15 12:48
답변 삭제  
1618년 요동순무 이유한(李維翰)은 누르하치의 요좌 진출에 대항하여 조선에 원병을 지시했으며, 계료총독 왕가수는 수만 명의 병력을 징발할 것을 요구하는 격문을 발송했다. 명에 대한 원병은 후금에 대한 적대로 이어져 조선 서북 지방에 대한 후금의 침략을 부를 것이고 이는 명이 요동 변경에 있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조선에 파병하면 선조 때처럼 왕권이 추락하거나 조선이 후금의 침입을 받아도 요동아문이 제대로 돕기 어려워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이때문에 비변사와 광해군은 칙서의 부재와 요동아문의 월권 등을 불편해하면서 조선군의 미약함, 명군의 변경 파견 요청 등을 명분으로 출병을 최대한 피하고자 했다. 조선의 바람과 달리 명군과의 군사적 공조가 현실화되자 광해군은 주본을 올린 이상 만력제의 성지가 없이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방침을 내놓는다. 그러나 경략 양호는 만력제의 칙서에 '고무조선(鼓舞朝鮮)'이라는 문구가 있었음을 내세우고, 재조지은의 논리로 출병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또한 조선 측의 자문에 대해서 관망의 태도가 있음을 힐책하고 예허의 적극적인 징발을 비교하면서 1만 명의 정병을 차출할 것을 명령했다. 소중화를 자부하던 조선의 정체성을 깎아내리고 성지를 거론한 양호의 논리는 조선의 명분을 전부 무력화시켰다. 이에 광해군은 자신에게 직접적인 성지가 없었다는 논리를 내세우나, 비변사는 경략이 칙서를 받든 이상 군사적 공조는 더이상 요동아문의 월권 행사가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켰다. 광해군은 이에 수긍하면서도 칙서의 부재를 내세웠고, 조정 신료들은 이에 동조하지 않았으나 그의 의중을 어느 반영해주었다. 광해군의 의지와 달리 요동아문의 분수도 염명태와 요동총병 이여백의 자문이 잇달아 수신되어 공조를 다짐했으며, 또 회답의 재촉과 추가 병력 배치를 요구하는 양호의 자문도 접수되었다. 게다가 병력을 준비해놓고 칙서를 기다리겠다는 성절사 윤휘의 주본이 명 조정에 수신되자 만력제는 병부의 복제에 따라 출병을 꺼리던 광해군에게 직접 칙서를 내려 출병하게 하였다.[46]
비변사가 아뢰기를, "적신 강홍립 등이 명을 받고 싸움터로 나갔다면 오직 적만을 쫓아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도중에서 먼저 통역을 보내어 미리 출병하는 까닭을 통지하는 등 마치 당초에 싸울 뜻이 없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이어, 도망쳐 돌아온 사람들의 말을 듣고도 반신반의하였다가 그들의 장계를 보니, 힘이 모자라 함락을 당하였다는 정상은 조금도 없고 또한 구차하게 살아난 것을 부끄러워하는 뜻도 없이 가는 길의 행군한 절차를 차례로 서술하고 감히 미리 통지하여 낭패하였다는 등의 말을 버젓이 아뢰면서 스스로 그들이 한 일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고 있으며, 끝에 가서는 다시 회답할 말을 지시해 주어 살아서 돌아오기를 꾀하고 있습니다." …… 전교하기를 …… 대국 섬기는 성의를 더욱 다하여 붙들어 잡는 계책을 조금도 해이하게 하지 말고 한창 기세가 왕성한 적을 잘 미봉하는 것이 바로 오늘날 국가를 보전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이다. 그런데 이것을 버려두고 생각지 않은 채 번번이 강홍립 등의 처자를 구금하는 일만 가지고 줄곧 계문하여 번거롭히고 있으니, 나는 마음 속으로 웃음이 나온다. 본사에서 누차 청하는 뜻을 나 또한 어찌 모르겠는가. 천천히 선처하여도 진실로 늦지 않다. 오직 국가의 다급한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할 것이다. 노추의 서신이 들어온 지 이미 7일이 되었는데 아직도 처결하지 못하였다. 국가의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모두 하늘의 운수이니 더욱 통탄스럽기만 하다."
《광해군일기[중초본]》 49권, 만력 47년 4월 8일 1번째 기사

출병이 불가피해지자, 광해군은 패전할 경우를 대비하여, 조선군이 명 장수의 지휘를 받지 않도록 하여 도원수 강홍립의 지휘권을 지키는 한편, 조선군을 명의 동로군에 예속시켜 자의에 따른 출병이 아님을 드러내고자 했다. 또한 동로군이 출병하기도 직전 후금과의 초피 교역을 시행하고 녹봉을 지급했으며, 이 과정에서 회령부사 한명련으로 하여금 누르하치의 차관 쇼롱오(šolonggo)에게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보냈지만 명군의 진[唐陣]의 뒤에 있을 것"이라 유시하였다. 한명련과 같이 광해군의 밀령을 받은 강홍립은 배동관령에 이르러 호역 하세국을 허투아라로 보내어 조선 측이 후금을 적대시하지 않으며, 이번 출병은 상국(명)의 재촉을 받아 부득이하게 한 것으로, 얼마안되는 군졸들은 명군 진 뒤에 있었다고 전했다. 마찬가지로 사르후 전투 현장에서는 조선군 좌우영이 전멸하자, 다이샨은 조선군 중영에 통사를 요구했고, 이에 강홍립은 통사 황연해로 하여금 "지금은 부득이 해서 온 것"이라 전했으며, 후금 측도 번호 출신들을 보내어 조선의 뜻을 이해하고 있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삼사에서는 강홍립 등을 적신(賊臣)이라 칭하면서 처벌을 주장했으나 이들에게 밀지를 내린 광해군은 그들의 처벌 논의를 수용하지 않았다.[47]

한편 1616년 정월, 누르하치는 겅옌 한(genggiyen han)이라는 새로운 칭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사르후 전투 직후인 3월 21일, 천명(天命, abkai fulingga) 2년(1618년)이라는 독자적 연호와 함께 후금국의 한(amaga aisin gurun-i han)과 천명금국한(abkai fulingga aisin gurun han)[48]을 자칭하며, 자신을 조선국왕(solho han)과 대등하게 설정한 국서를 보내어 통교를 요구했다. 광해군은 후금과의 교섭을 통해 난극을 타개하고자 하였으며, 신료들과 달리 비록 속국관계와 그에 따른 사대관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누르하치와의 직접적인 대화에 중점을 두었다. 누르하치는 이외에도 4월 4일 칭한(稱汗)은 물론 명을 남조(南朝)라 지칭하는 서신들을 보내왔으며, 1621년 3월과 6월에는 각각 만주국 한을 자칭하며 광해군을 너(si)라고 지칭하거나, 만포진이 아닌 의주로 발송하는 조서를 보내왔다. 조정은 회신은 절대 불가하다고 반발했지만, 광해군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서를 받은 것에 대해 개의치 않으며 대화를 강조했다. 그는 즉시 차관을 파견하여 회신을 우호적으로 할 것을 명하는 한편, 회신에 반대하는 비변사 당상들을 세상 물정도 모르는 선비라고 질책했다. 광해군의 독촉에 비변사는 마지못해 그에게 동의했으며, 마침내 누르하치를 '후금국 한 전하(殿下)' 지칭하고 후금과의 신의를 강조하는 답신을 보냈다.[49]

1622년 4월 명이 감군어사 양지원(梁之垣)을 파견하여 청병칙서를 전달했다. 칙서를 근거로 징병을 거부하덤 광해군은 관외가 모두 누르하치의 수중에 들어간 상황에서 선박 지원 외에 군사의 파병은 불가하다는 새로운 명분으로 이를 거절했다. 비변사는 노골적으로 반발하여 명 측과 합의 사항을 도출했으나 광해군은 이에 인준을 거부하였으며, 양지원은 시간을 끄는 조정의 행태를 힐난하며 담당 관리를 군율에 따라 처단하겠다는 언동을 일삼았다. 이렇든 칙서와 존호마저 거절한 광해군은 그해 10월 신료들의 반발 심리를 무릎쓰고 후금에게 국서를 회신하고, 11월에 이르면 마침내 모문룡 휘하 명군을 가도로 이주시킴으로써 1622년 10월경부터 조선과 후금 간 긴장관계는 개선되었으며, 누르하치는 이후 요서 공략이 집중했다. 이런 형세는 정묘호란 발발 직전인 1626년 12월까지 지속되었다.[50]
소성정의 왕대비(昭聖貞懿王大妃)는 다음과 같이 이르노라. …… 우리 나라가 중국을 섬겨온 지 200여 년이 지났으니 의리에 있어서는 군신의 사이지만 은혜에 있어서는 부자의 사이와 같았고, 임진년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준 은혜는 영원토록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선왕께서 40년 간 보위에 계시면서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시며 평생에 한 번도 서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으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광해는 은덕을 저버리고 천자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배반하는 마음을 품고 오랑캐와 화친하였다. 이리하여 기미년(1619)에 중국이 오랑캐를 정벌할 때 장수에게 사태를 관망하여 향배(向背)를 결정하라고 은밀히 지시하여 끝내 우리 군사 모두를 오랑캐에게 투항하게 하여 추악한 명성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 온 중국 사신을 구속 수금하는 데 있어 감옥의 죄수들보다 더하였고, 황제가 칙서를 여러 번 내렸으나 군사를 보낼 생각을 하지 아니하여 예의의 나라인 우리 삼한(三韓)으로 하여금 이적 금수의 나라가 되는 것을 모면하지 못하게 하였으니, 가슴 아픈 일을 어떻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천리(天理)를 멸절시키고 인륜을 막아 위로 중국 조정에 죄를 짓고 아래로 백성들에게 원한을 사고 있는데 이러한 죄악을 저지른 자가 어떻게 나라의 임금으로서 백성의 부모가 될 수 있으며, 조종의 보위에 있으면서 종묘·사직의 신령을 받들 수 있겠는가. 이에 그를 폐위시키노라.

광해군일기[중초본] 187권, 천계 3년 3월 14일 1번째 기사

일련의 사건은 광해군의 외교 정책이 명을 은밀히 기만하던 차원에서 공개적으로 명을 기피하는 차원으로 전환되었음을 의미하며, 조선의 적극적 공조로 자리잡혀가던 명질서의 균열 조짐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양반귀족 지지와 명 황제의 승인을 조선국왕의 정통성을 삼은 조선의 양반귀족층에게 군부(君父, 명)와 이적(夷狄, 후금)의 대치 속에서 신자(臣子, 조선)의 이러한 행태는 종주국 황제에 대한 속국 군주의 항명을 넘어 패륜으로 받아들여졌다. 보국안민을 내세우며 실행한 대후금 교섭으로 인해 오명을 쓴 고달픈 처지를 토로하던 광해군은 능양군과 서인에 의해 배명(背明) 행위 등을 했다는 이유로 폐위됐으며, 정변으로 성립된 인조 정권은 명 황제의 책봉을 받기 위해 매달리다시피 하는 것은 물론 모문륭 휘하 명군에게 물자를 쏟아 붇는 등 강한 친명 노선으로 회귀하였다.[51]

이상, 국가안위와 국경의 그러한 위태한 상황에서도 오로지 광해군의 보국안민과는 역행한 썩어질 인조반정을 기획하고 실행한 역적 모사꾼(?)들의 궤변 실태를 퍼와서 기록하였다. ~~~흠~~~

海印導師.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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