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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07-23 07:53
남아공 폭동 교민 피해
 글쓴이 : 海印
조회 : 375  
   https://www.youtube.com/watch?v=vfIeR5PtPpo [36]
약 이주일 전 경 발생한, <글로벌 이슈> 뉴스내용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하면, 자연풍광이 좋고, 다이아몬드 생산량이 높고 등등~~~그나마 기후조건이 좋고, 아프리카 국가중에서 영국식민지에서 벗어난 후, 그나마 살기 좋은 국가로 알고 있다. 한 번쯤 반드시 여행하고 싶었던 국가 중의 한 곳이다.

문제는 현재 국가의 치안상태가 폭동으로 인하여 심각한 수준까지 진행함에도 불구하고, 당국에서는 군 병력까지 동원했지만 폭동 진안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이다.

장차 과연 어떻게 진행할까 자못 궁금하기만 하다.~~~흠~~~

海印導師. 씀.

海印 21-07-23 08:18
답변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내가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유명한 흑인 운동가 <넬슨 만델라> 때문이었다.

이하 그의 경력사항을 퍼와서 올린다.

즉, 출생과 학창시절

1918년 7월 18일 트란스케이 움타타에서 출생하였다. 템부(thembu)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족장에서 물러나자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 성장하였다. 부족이 섭정에게 의탁되어 통치되었으며 만델라는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클라크버리(Clarkbury) 중등학교를 다녔다. 1940년 포트헤어대학 재학 중 친구가 백인에게 모욕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 처음으로 인종차별적 대우의 부당함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대학에서 학생대표위원회으로 활동하다 학교측과 언쟁으로 갈등을 일으켰고 교장에게 불복종하여 학교에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집안에서 정해준 여성과 약혼하기를 강요받자 집을 나와 요하네스버그로 갔다. 한때 금광에서 일하였지만 집에서 달아난 흑인임을 알려지자 곧 그만두게 되었다. 친척의 도움으로 요하네스버그 부동산 사무실에서 서기로 일하게 되었으며 장차 변호사가 되기 위해 법률공부를 시작하였다.

흑인인권운동 전개

법학은 만델라에게 유일한 지적 관심의 대상이었으며 마침내 1943년 비트바테르스란트(Wit Watersrand)대학에 입학하여 법학을 전공하게 된다. 1944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산하 청년연맹을 창설하였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동료였던 월터 시술루의 여동생을 만나 결혼하였다. 1951년 동료인 월터 시술루와 함께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가 벌였던 비폭력운동을 전개하였으며1952년 비백인(非白人)으로서는 처음으로 요하네스버그에 법률상담소를 열었다.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인종격리정책을 뜻하는 아프리칸스어)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본격적으로 흑인인권운동에 참가하였다. 1950년대 들어 남아프리카에서는 흑인에 대한 차별적 정책이 점차 엄격해졌는데 공공장소와 대중교통, 교육시설, 거주지 등 일상의 대부분에서 흑인과 백인을 강제로 분리하는 정책이 시행되었다. 이에 만델라는 아프리카 국민회의를 중심으로 불복종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남아프리카에서는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정치세력을 축출하는 포고령이 내려졌는데 1952년 만델라는 아프리카 국민회의 소속이었지만 공산주의와 교류가 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하지만 재판을 받고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이후 만델라는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전개하였고 이무렵 첫번째 부인과 이혼하였다.

무장투쟁과 27년간의 복역

1955년 흑인 거주지인 요하네스버그 소웨토(Soweto)구역에서 남아프리카 인종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유헌장》이 선포되었고 만델라는 《자유헌장》 발표에 관련되어 두번째로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의 죄목은 국가반역죄였는데 1961년 최종 무죄로 판결받고 석방되었다. 1957년 만델라가 속한 아프리카 국민회의외 또다른 방계 단체인 범아프리카회의(Pan Africanist Congress. PAC)가 출범하였는데 이들은 강경한 투쟁을 표방했다. 1960년 3월 요하네스버그 남쪽에 있는 샤프빌(Sharpeville) 마을에서 대규모집회가 열였고 경찰은 총기를 난사했다. 69명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부상하였는데 만델라는 이를 흑인학살사건으로 규정하고 이를 계기로 평화시위운동을 중단하고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심한다. 1961년 6월 비밀회의에서 '국민의 창(Umkhonto we Sizwe)'이라는 비밀군대를 조직하였다. 만델라는 정부군에 맞써 싸우기 위해 게릴라전술을 습득하였고 에티오피아로 건너가 군사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1962년 아프리카를 전역을 여행하며 무장투쟁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였고 아프리카의 여러나라에서 '국민의 창'에 동참해 줄 것을 연설했다. 1962년 만델라는 요하네스버그로 돌아와 국민의 창 회동을 가졌다가 은신처로 돌아가는 길에 체포되었으며 5년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1964년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에스퀴티니섬 로벤 아일랜드 감옥에서 27년을 복역했다. 1979년 옥중에서 자와할랄네루상(賞), 1981년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1983년 유네스코의 시몬 볼리바르(Simon Bolirar) 국제상을 받았으며 세계인권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다.

노벨평화상 수상과 남아프리카 대통령 선출

1990년 2월 2일 남아프리카 대통령 프레데리크 데 클레르크는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범아프리카회의(PAC) 등 흑인 정치 및 인권단체의 합법성을 인정하고 그동안 내려진 금지조치를 철회하였다. 그리고 아프리카 흑인해방을 위해 투쟁한 지도자 약 375명을 석방하였다. 27년 간을 감옥에서 복역한 만델라는 1990년 2월 11일 석방되었으며 열렬한 군중의 함성속에 그는 주먹을 쥐고 팔을 들어올렸다. 출소 후 프랑스, 영국, 미국, 쿠바 등을 여행하며 세계 지도자를 만났다. 특히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은 만델라를 지지했던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1991년 7월 아프리카 국민회의(ANC) 의장으로 선출되었지만 남아프리카의 현실은 여전히 백인정부와 반목과 갈등이 계속되었다. 백인정책에 반대하는 흑인들의 시위는 이어졌고 경찰의 무력진압으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만델라는 흑인 극단주의자들에게서 온건하다는 비난과 줄루족 등 흑인 종족간의 갈등으로 복잡해지는 상황 속에서도 백인정부와 협상을 지속했다.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는 종식되어야 마땅하지만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유지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만델라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파국을 막기위해 클레르크의 백인정부와 줄루족 등과 협상을 벌여 민주적인 선거를 관철시켰다. 이러한 공로로 1993년 클레르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1994년 4월 27일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참여 자유총선거에 의하여 구성된 다인종(36개의 분파가 존재) 의회에서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마침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는 종결되었고 350여 년에 걸친 인종분규를 종식시켰다.

저서로 자유를 위한 투쟁 의지를 밝힌 《투쟁은 나의 인생 The Struggle is My Life》(1961)과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 Long Walk to Freedom》(1995)이 있다. 1995년 7월과 2001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간의 우의와 경제협력 방안을 협의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넬슨 만델라 [Nelson Rolihlahla Mandela] (두산백과)

海印導師. 合掌.
海印導師 21-07-23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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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 남아프리카공화국(남아공)에서 발생한 폭동으로 인해 지금까지 337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남아공 정부가 밝혔다. 전날 사망자 276명보다 더 늘었다.

22일(현지시간) AFP통신에 따르면 쿰부조 은샤베니 내각 장관은 "남아공 경찰이 소요사태와 관련한 총 사망자 수를 고텡주에서 79명, 콰줄루나탈주에서 258명으로 수정했다"고 말했다.

은샤베니 장관은 최근 사망자 중에는 폭동 중 입은 부상으로 인해 숨진 사람들이 있다고 덧붙였다.

제이콥 주마 전 남아공 대통령이 재임 9년 동안 저지른 부정부패 혐의에대한 남아공 당국의 부패 조사를 무시해 지난달 법정모독죄를 선고 받았고, 지난 8일부터 15개월의 복역을 시작했다.

이튿날 촉발한 이번 폭동으로 벌써 일주일째 식량·연료·의약품 약탈 등의 폭동이 이어지고 있다.

시릴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은 이번 폭력사태를 '반란 시도'로 규정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 정책과 제도) 종식 이후 최악의 소요사태로 치달았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 약 34억달러(약 3조9083억원)의 피해가 발생했다.

또한 남아공 당국에 따르면 현재까지 800여곳의 상점이 약탈 피해를 입고, 최소 2203명이 체포됐다.

폭력은 남아공 국내총생산(GDP)의 약 50%를 차지하는 가장 인구가 많은 두 지역인 콰줄루나탈주와 고텡주를 통해 확산됐다.

주마 전 대통령은 수감된 지 며칠 만에 병으로 사망한 동생 마이클 주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한 가석방을 허락받아 이날 남동부 에스트코르의 감옥에서 잠시 떠날 수 있었다. 현재는 다시 교도소로 돌아왔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교도관들이 주마 대통령과 동행했다.군인들은 그의 방문지 인근을 순찰하고 군용 차량과 경찰 차량이 도로를 따라 배치됐다.

은샤베니 장관은 기자회견에서 "현재는 그가 에스트코트 교정시설로 돌아왔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교정국은 성명에서 주마 전 대통령이 단기적이고 위험성이 낮은 수감자로 간주돼 동정적인 휴가를 받았다고 밝혔다. 그는 죄수복도 입지 않았다.

현재 폭력 시위는 수그러들었고, 지금까지 라디오 DJ를 포함한 6명이 공공폭력 선동 혐의로 체포됐다.

남아공 당국에 따르면 현재까지 800여곳의 상점이 약탈 피해를 입고, 최소 2203명이 체포됐다.

海印導師  기사내용 퍼와서 싣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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