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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12-29 21:58
세토막 이야기
 글쓴이 : 날범
조회 : 607  




오늘 응답하라 1994가 종영 방송을 했다.... 그렇다면 시리도록 그리운 우리의 1971년은 어디에서 응답할 것인가? 세 개의 추억으로 응답하는 나의 고교 시절의 기억 세 토막을 올린다



첫번째 이야기

ㅡ . 닭서리

내 머리에 내린 서리가 밤새 창 밖 잔디에도 하얗게 내렸다. .햇살에 반짝이는 서리를 보노라니 서리라는 말이 생각난다. 푸근한 인심으로 용서해 주던 수박서리 .콩서리와 함께 까마득한 세월 저 넘어 어처구니없었던 닭서리를 이야기 하고 싶다. 42년 전 1971년 동짓달인지 섣달인지 모교의 자율학습교실에서 숙식을 하며 예비고사를 치고 본고사를 준비하던 친구들, 저녁을 먹은 지 두어 시간이 지나자 배가 출출하고 입이 궁금했던지 어떤 친구가 먼저 입을 열었겠지, “야! 닭서리 해 먹을래“ , 했을 것이고, 누구는 ”맞다, 닭서리 하다가 들켜도 별로 야단치지도 않더라. 장난아이가! “ 하며 맞장구를 쳤을 거라.
누군가 우리 동네에 닭 키우는 집이 많다며 물색한 장소가 보문 입구, 남씨 마을 인기라
즉시 특공대가 조직됐고 대장은 자기 동네를 털자고 한 모모가 인솔하여 떠났다. 학교에서 보문 남씨 마을까지는 가까운 거리도 아니다. 차도 없는 그 엄동설한에 특공대를 보내놓고 난로 위에 두말들이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달콤한 닭국물을 생각하며. 그놈의 닭이 모가지를 틀어지고 오기만 기다린 지 두어 시간 지났을 것이다. 특공대로 떠났던 한 친구가 숨이 목구멍까지 차 들어오며 “야! 야 ! 큰일났데이. 야들이 붙잡혔데이 누구하고 누군데” 하며 사색이 다되어 왔는기라.
얼마 후 자기 동네를 털자든 모모는 닭 한 마리를 틀어쥐고 와서는 의기양양하며 다른 애들을 찾고 있었는데. 모두 침울한 기라.
어쨌든 그 닭 한 마리를 뜨거운 물로 튀겨 털을 뽑고 주전자에 삶았다. 고기 두어 조각 든 닭 국물 한 대접 마시는 것이 근심을 두 대접은 먹는 기분이었다. 잠시 후 포로로 잡혔던 친구들이 풀려나서 오긴 했는데 내일 아침까지 닭 세 마리 값을 들고 가야한다며 패잔병의 어눌한 목소리로 풀이 죽어 있었던 기라. 우린 모두 추렴을 해 닭값을 치르는 동안 먹은 닭이 뱃속에서 홰를 치고, 닭다리 잡고 삐약거리고 있는 기라.
그 때 함께 했던 친구들 나만 빼고 모두들 잘되 인생을 잘 살고 있더라. 또 한 해가 저무는 이 밤 지난 것은 무엇 하나 그립지 않는 것이 없구나.

통닭 한 마리 시켜야겠다.


두번째 이야기

ㅡ. 자존심

나는 평생에 주먹을 쥐고 싸워 본 것은 세 번 있었다. 정말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모두 자존심 때문이었다. 그 중 한 번은 동기생 중 한 명이다.
고 1이었던 것 같은데 무엇 때문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친구와 시비가 붙었고 주위의 다른 친구는 구경 꺼리가 생겼다는 듯 우리의 자존심을 건드리며 싸움을 부추기고 있었던 것이다. 큰소리는 쳤지만 싸우고 싶지는 않았던 것인지 곧 선생님이 들어오신다는 것을 핑계로 점심시간에 나가자며 씩씩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수업은 귀에 안 들어 오고 어떻게 하면 싸우지 않고 피할까 고민만 하다 점심시간이 되었다. 누군가 “너그들 안나가나. 가만 있나”. 추구리며 잠재우려던 자존심을 일깨우는 것 아닌가.
어쩔수없이(?) 우리는 학교 뒷담을 넘었다. 왜 그랬을까? 학교에도 구석진 곳이 있고 교실에서도 치고받고 싸우던 친구도 있었는데.. 우리는 친구들이 보지 않는 다른 곳에서 결투를 택했고 (어쩌면 서로가 확실한 승패를 자신할 수 없었기에 친구들 앞에서 자존심을 구기기 싫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뒷담을 넘은 북천은 어디에도 몸을 숨길 곳이 없는 휑한 들판이었다. 둘은 마땅히 싸울 곳을 찾는 건지 싸우지 않을 핑계를 찾는 건지 북천을 건너고 외딴집 앞 감나무 길을 지나 백율사 뒷길 산으로 올랐다.
처음에 달아올랐던 화는 사그라지고 머쓱한 채로 산을 오르며 우리는 서로 싸우지 않고 돌아갈 방법을 찾았지만 아무도 먼저 말을 건네지 못했다. 말없이 걷다보니 산 중턱에 있는 묘까지 왔던기라. 평평하고 잔디까지 포근하게 까려있어 더 이상 장소를 물색할 핑계도 없어 “여기서 하자” 하며 O.K 목장의 결투를 했는기라. 그 친구는 태권도가 1단인지 2단이라던가. 그는 발차기를 주로하고 나는 잡으면 된다고 하였던 것인데 어느새 서로 안고 뒹굴다가 누군가 이제 그만 하자는 소리에 무승부의 결투를 한 적 있다.
명분도 실익도 없는 자존심 때문에 쓸데없는 싸움을 한 기억도 세월이 지나니 내 가슴에 분홍빛 추억으로 새겨져 있다.
그는 누군가? 기억이 확실하지 않는데 ,혹시라도 이 글을 읽으면 만나서 술 한 잔 하자.



세번째 이야기

ㅡ. 완전 범죄

동짓달 그믐달이 아직 까만 베일같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플라타너스 낙엽이 갈 곳을 몰라 서성이던 밤이었다. 까만 교복으로 위장한 도굴범들이 긴 줄로 서서 바께스로 무언가 넘겨주고 있었다. 경주 고등학교 본관 좌측 현관 안쪽에 마련된 석탄(조개탄) 보관소와 뒷 교사 사이에 있는 석탄 창고까지는 30여m. 스무 여 명의 까까머리 학생들이 줄을 서서 석탄을 옮기는 장면이다. 예비고사 후 본관 교실 하나를 빌려서 본고사를 준비하던 친구들 .난방 연료로 쓰던 석탄만큼은 회비를 모아 구입했기에 그것을 좀 아끼려고 그리고 그 돈으로 군것질을 하려고 했던지 20여명이 어떻게 그리 쉽게 공모를 했을까. 용이주도하게 숙직 선생님이 없는 날과 달빛도 없는 그믐날을 잡아 석탄 창고 뒤 판자를 뜯었다. 사다리를 타고 창고로 내려간 한 친구는 창고에서 바께스에 석탄을 퍼 올리고 그것을 사다리 위의 또 한 친구는 받아 아래로 내려 보내면 밑에는 스무 명의 친구들이 받아 릴레이로 본관 석탄 보관소에 보내는 것이었다. 누가 맨 처음 생각해내었는지 모르지만 최초의 공범죄이고 이제는 공소시한도 벌써 끝나버린 완전범죄도 그날 밤처럼 까만 기억이 시리게 아프다.

좋은 친구들 새 해에는 건강하고 즐거운 일 많으시길......김일호 배상

海印 13-12-30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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亦是 시인의 글이라 재미있게 잘 읽었다.

삼촌 갑수도 잘 지내지라.

이제 극음의 계절이 가고 일양의 시작이라, 한 달만 지나면 대망의 갑오년이 된다.

언제 어디서나 항상 즐겁고 행복하게 잘 지내거라.

참고로 특수절도죄의 <공소시효>는 실행행위를 종료한 시점부터 처단형일 경우 최고로 악질판사가 법정 최고형을 때려봤자 6년이니까, 공소시효는 7년이면 종료한다. 그러니까 완전범죄로 형을 받지 않아도 1978년 무오년 12월31일에 이미 <공소시효>가 종료되었다. 축하한다. 이제 새로운 특수절도(2인이상 여러 넘이 공동행위를 하면 특수라는 좋은 것이 앞에 붙지라.ㅎㅎ) 범죄만 범하지 않으면 특이사항 없다.

계사 12월30날 아침에 동백동에서...  海印.
김일호 13-12-30 12:43
답변  
삼촌과 친구니 부담스럽네 ,, 그래도 친구는 친구.  내년에 퇴임하신다니 인생 이모작 준비 단단히 해서 나오시게
     
海印 13-12-30 14:21
답변 삭제  
일호님!

우리가 삼자 대면을 할 당시에는 삼촌과 海印을 동격으로 모셔야 한다(존댓말 쓰고 ㅋㅋ)

그러나 이자 대면은 무조건 친구니라. 무엇 껄끄러울 것이 전혀 없느니라.

감사! 목하 현재 퇴임 준비 중일세. 그저 조용하게스리...

海印.
西岳 13-12-30 21:59
답변  
이런 이런 ~ 그저 올려 주면 좋은줄 아나?

무릇 삼촌이라 카면, 조카앞에
늘 주머니 끈 열어 놓고 살아야 한다.
그런 사실도 인정하나?

돈 낼 때는 친구인데, 할라 카면
아예 삼촌 이라 그카지 마세이.
     
海印 13-12-31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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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것이 쪈(빚)밖에 없는 데, 까짓거 조카에게 마음껏 함 베풀지뭐라.

일억원 빚이나 백억원 빚이나 그넘이 그넘이다.

다만 일천억 원을 넘어서니(김우중 사례) 빚이 빚이 아니라 재산이 되어버리더라. ㅎㅎㅎ

海印.  어제밤 야근을 마치고 나서 졸리는 중에 댓글 답변으로 횡설수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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