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북애자가 눈물로 쓴 한민족사 ㅡ단군조선 47대 역대세계
북애(北崖)가 눈물로 쓴 한민족의 역사 <규원사화>는 개벽(開闢) 신화로 시작된다. <규원사화>의 개벽신화인「조판기」는 지금까지 알려진 다른 설화들과 달리, 천지의 개창과정을 언급한 것이 특이하다.
천지가 개창되어 환웅이 하강할 때까지의 기간은 수십 만년으로 되어 있다.
「태시기」는 환웅이 동방을 다스리던 궐년(闕年 : 수만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른 바 신시시대다.
이 시대에 치우씨(蚩尤氏), 고시씨(高矢氏). 신지씨(神誌氏), 주인씨(朱因氏) 등의 씨명(氏名)이 등장한다.
물론 이 시대에는 한자가 없었으므로 일부에서 주장하는 약속의 기호인 고유 문자나 구전되어 온 것을 후대에 한자를 빌어 기록했을 것이다.
신시시대의 영토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서남방, 즉 중국 동북방에는 치우씨의 족이 거주하고 북동지방에는 신지씨, 그리고 동남지방(한반도 북부)에는 고시씨가 거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고시씨의 후예는 후에 계속 한반도의 남쪽으로 뻗어 내려왔다. 치우씨는 계속 서남쪽으로 진출하여 중국 제족을 정복하면서 영토를 확장했다.
신시의 천왕 환웅은 말년에 태백 산정에 천부인(天符印) 3개를 놓고 신선이 되어 승천하였다고 하며 다음은 단군의 시대로 이어진다.
《규원사화》의「단군기」는 환웅의 아들 환검(桓儉)이 백산(白山) 단목(檀木) 아래에서 즉위한 후로부터 마지막 왕인 제47세 고열가(古列加) 단군이 아사달의 당장경(唐莊京)에 들어간 1195년 동안의 기록이다. 때문에「단군조선 실사(實史)」라고 한다. 이 부분이 바로《규원사화》의 본론에 해당한다.
◇ 단군조선역대세계(世系) (재위년수)
1세 시조단군 (壬儉 또는 桓儉, 93) 2세 부루(夫婁, 34)
3세 가륵(嘉勒 , 51) 4세 오사구(烏斯丘, 49)
5세 구을(丘乙, 35) 6세 달문(達門, 32)
7세 한율(翰栗, 25) 8세 서한(西翰, 일명 烏斯含, 57)
9세 아술(阿述, 28) 10세 노을(魯乙, 23)
11세 도해(道奚, 36) 12세 아한(阿漢, 27)
13세 흘달(屹達, 43) 14세 고불(古弗, 29)
15세 벌음(伐音, 33) 16세 위나(尉那, 18)
17세 여을(餘乙, 63) 18세 동엄(冬奄, 20)
19세 구모소(구牟蘇, 25) 20세 고홀(固忽, 11)
21세 소태(蘇台, 33) 22세 색불루(索弗婁, 17)
23세 아물(阿勿, 19) 24세 연나(延那, 13)
25세 솔나(率那, 16) 26세 추노(鄒魯, 9)
27세 두밀(豆密, 45) 28세 해모(奚牟, 22)
29세 마휴(摩休, 9) 30세 내휴(奈休, 53)
31세 등올(登올, 6) 32세 추밀(鄒密, 8)
33세 감물(甘勿, 9) 34세 오루문(奧婁門, 20)
35세 사벌(沙伐, 11) 36세 매륵(買勒, 18)
37세 마물(麻勿, 8) 38세 다물(多勿, 19)
39세 두홀(豆忽, 28) 40세 달음(達音, 14)
41세 음차(音次, 19) 42세 을우지(乙于支, 9)
43세 물리(勿理, 15) 44세 구홀(丘忽, 7)
45세 여루(餘婁, 5) 46세 보을(普乙, 11)
47세 고열가(古列加, 20)
여기에 한가지 특기할 사실은「단군기」에 나오는 47세 단군 1,195년 동안에 조선이 중국의 하(夏), 상(商 ; 殷) 왕조와 전쟁을 한 회수가 대략 8, 9회가 된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제24세 연라(延那) 2년 경인년(庚寅 ; 단기 803, BC 1531)에 은(殷)이 조선의 남계를 먼저 침범하다가 격퇴당한 사실이 한번 있었던 것 이외에는 언제나 조선 측에서 하, 상 왕조를 먼저 공격했고, 대개의 경우 국경을 넘어서 중국 본토에 진격하여 승첩을 거두고 돌아왔다고 한다.
단군조선의 소위 극성(極盛)시대라고 볼 수 있는 제13세 흘달(屹達) 단군 때부터 제15세 벌음(伐音) 단군 때까지 약 100여 년간(단기 491~595, BC 1843~1739)은 조선의 군대가 하나라의 산서(山西) 지방까지 깊숙이 진격하여 공략하여 마침내 하왕조가 화해를 청해 이를 수락했다는 것이다.
《진역유기》를 바탕으로 당시 조선에 있던 제사서(諸史書)와 중국 고서에서 사실(史實)을 확인하여 단군조선의 왕대와 중국과의 접전 화해 상황까지 밝힌 북애자는 '한(漢)나라는 한(漢)나라요, 우리 나라는 우리 나라이니 어찌 당당한 진역(震域)을 견주어야만 만족하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북애는 이같은 역사가 선가(仙家)에 살아 있다면서 또 다른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북애가 중국 사서에서 찾아 고조선과 중국의 전쟁기록을 삽입하여 고조선의 실체를 규명하고 있는 것이다.
300여 년 전의 사화이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읽기는 어색한 경우도 없지 않으나 사실(史實)을 대비한 것은 괄목할 사료(史料)의 발굴인 것이다.
출처:되찾아야 할 우리역사
<주간조선>1985년 10월 20일~1986년 10월26일 연재 -
*10회 연재 끝
海印導師 퍼 와서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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